조금씩 생긴 변화
나는 지난달 약을 줄인 뒤로 생긴 변화에 대해 집중적으로 이야기했다.
"제일 큰 변화는 짜증이 늘었다는 사실이에요. 저녁만 되면 아이들에게 화가 많이 나요. 똑같은 상황인데 더 견딜 수 없는 거죠. 손에 잡히는 대로 무언가를 던지거나 소리를 꽥 질러요. 그렇게 분노를 터트리면 아래로 아득히 떠밀려 내려간다는 생각이 들어요."
"많이 예민해졌나요?"
"네. 힘들어요. 내가 아닌 것 같아요."
"다시 약을 늘리기는 싫죠?"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새로운 약을 추가하는 방법이 있어요. 지금 먹는 약과 함께 복용하면 효과가 좋거든요. 예민함을 줄일 수 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10년 동안 특히 최근 3년 사이에 다양한 정신과 약을 먹었다. 새로운 약을 먹고 약 용량을 조절하는 일에 어느 정도 내성이 생겼다고 믿었는데 이런 변화는 항상 나를 긴장시킨다. 약을 영양제라고 생각하는 일은 쉽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일은 별개의 문제다.
"음, 또 어떤 일이 있었나요?"
"며칠 전에 엄마가 저에게 하소연을 길게 하셨어요. 도망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마음 한편에 물길을 만들었어요. 저 멀리 바다로 흘러가게요. 엄마의 말이 제 안에 고이지 않길 바라며 저 멀리 흘러가라, 흘러가라 했어요."
"왜 그랬죠?"
"어릴 때 생각이 나서요."
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어갔다.
"엄마가 신세한탄을 늘어놓을 때마다 힘들었어요. 어린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말이죠. 아빠랑 심하게 싸울 때마다 엄마가 도망갈까 봐 늘 불안에 떨었어요. 근데요 지금은 저와 엄마를 분리시키려고 해요. 어릴 때는 내가 뭔가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는데 이제는 그런 맘을 떠나보냈어요. 제가 해결할 필요도 없고, 해결할 수도 없는 부분이에요. 물론 엄마가 나 아니면 누구한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도 있어요. 그렇지만 이젠 제가 먼저예요."
"어머니도 스트레스를 어떻게 해소하는지 아마 당시엔 잘 모르셨을 것 같아요."
"아마 그랬을 수도 있겠죠."
"어머니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시나요?"
"운동을 자주 하셨어요. 뭐 종류는 다양해요. 수영, 요가, 에어로빅. 지금도 늘 등산과 요가를 하세요."
나는 조용히 말을 했다.
"그 뒤로 한동안 침울하게 지냈어요. 이 사건이 환기하는 어릴 때 기억이 썩 유쾌하지 않거든요."
"제가 혹시 트라우마 치료에 대해 말한 적이 있나요?"
"예전에 말씀하신 거 같은데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이 잘 안 나요."
나는 그가 말하는 트라우마 치료에 대해 유심히 듣고 질문을 던졌다. 2년 전에 심리상담을 6개월 받았을 당시 힘들고 무거운 기억을 끄집어내서 햇볕에 탈탈 털어 말리는 일련의 과정이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그걸 또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더럭 겁이 났다. 무엇보다도 난 내가 과거로부터 어느 정도 회복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다.
우리는 계속 대화를 나눴다.
"요새 부러운 사람이 있어요. 누가 책을 출간했다고 하면 부러워요. 그에 비하면 난 볼품없고요. 그 사람한테 순도 100%의 진심을 담아 축하한다고 말을 못 하겠어요. 초라한 제 자신이 도드라져 보이거든요."
그가 싱긋 웃었다.
"부러운 감정이 드는 건 자연스러워요. 그럴 수 있어요. 상대방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이 아니라면 그런 자신의 마음을 인정해줘요. 상대방이 부럽다고 그 사람한테 악담을 퍼붓거나 악성 댓글을 달지 않죠?"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괜찮아요. 축하한다는 말을 쉽게 하지 못하는 자신이 이상한가? 옹졸한가? 이런 마음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됩니다. 자책하지 마세요."
"그 사람을 보면 괜히 제 자신이 초라해 보여서 거리를 둔 적도 있어요. 이것도 괜찮은 방법인가요?"
"그렇죠. 우리가 항상 이성적으로 대처할 필요는 없잖아요? "
그에게 항상 이성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들으니 왠지 나 자신이 용서받은 기분이 들었다.
이번엔 내가 말을 길게 했다.
"시간이 좀 지나자 괜찮아졌어요.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나는 나다, 내가 그 사람이 될 수도 없고, 될 필요도 없다. 뭐 이런 생각을 했지요. 그리고 그도 분명 책 쓰느라 내가 모르는 고생을 많이 하고 노력도 엄청했을 거예요.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어느새 부러운 감정이 사라지고 그 사람에 대해 진짜 축하해줄 수 있는 마음이 남더라고요. 물론 시간은 좀 걸렸지만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 리리 씨가 준 책 읽어봤어요. 마침 환자가 없어서 바로 읽었지요."
그가 입을 열자 나는 시험지 채점을 끝난 선생님 앞에 선 학생처럼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좀 부끄러웠어요."
나는 그가 왜 부끄럽다고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럴 수도 있죠. 어떻게 일일이 다 기억하겠어요..."
그가 약간 긴장한 듯 말했다.
"이야기가 금방 끝나버려서 뒷 내용이 궁금했어요. 어떻게 되었는지 좀 더 자세했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
나는 그의 말을 유심히 들었다.
"아, 그렇군요. 저에게 피드백해주셔서 감사해요." 나는 조그맣게 웃었다.
오늘 우리의 대화는 예전보다 길어졌다. 대화 주제가 정신과 진료와 의사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갔다.
"선생님도 많이 힘드시죠? 제가 만났던 첫 번째 의사는 진료를 2~3분 정도밖에 안 봤어요. 증상을 이야기하면 약 처방이 끝이었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안 그러시잖아요."
"음, 아마 병원 수익이나 효율성 측면에서 보면 앞선 상황처럼 하는 게 훨씬 낫죠.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제가 아마 완벽주의자라서 그런가 봐요."
나는 그가 말하는 완벽주의가 어떤 의미인지 단번에 이해했다.
"대신 환자 입장에서는 참 좋아요. 아시죠?"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
그가 싱긋 웃었다.
우리는 한 달 후에 만나는 걸로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병원을 나오면 나는 그의 평화를 빌었다.
그리고 새로운 약을 먹고 어느 정도 평온해진 내가 될 수 있기를 소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