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끝없는 괴로움 속을 헤맬 때

보수동 책방골목

by 키키 리리

내가 누군가에게 선물로 준 책이 중고시장에 나와있는 것을 보았다. 확인한 방법을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가 준 책은 틀림없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 사람에게 따져 묻거나 왜 그랬냐고 힐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실망한 마음을 쉽게 감출 수는 없었다. 그에 대한 실망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실망이다. 내가 준 선물을 소중히 여기고 좋아하길 바라는 마음은 욕심일까? 선물을 주었을 때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람, 주는 기쁨만을 오롯이 느끼는 사람만이 선물을 줄 수 있다는 말을 떠올리면 씁쓸했다.


그렇다고 나를 선물 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소장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으니 팔았겠지. 고작 몇 천 원에. 그것까지 내가 어떻게 관여한단 말인가? 나는 훌훌 털어버리려고 노력했다. 인간은 사건이 일어나면 선택을 한다. 그 순간에 생긴 감정은 어찌할 수 없지만 그 감정을 어디까지 끌고 가느냐는 선택의 영역이다.


궂은 마음은 금세 개었다. 대신 그동안 갖고 싶었던 책을 사러 보수동 책방골목에 가기로 했다. 책 때문에 받은 상처는 책으로 치유해야 한다는 이상한 결심을 가지고 말이다. 내가 가지고 싶은 책은 이미 절판이라서 인터넷 서점에서 살 수 없다.




나는 책을 살 수 있을까?


보수동 책방골목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중앙역에서 내렸다. 학생들과 동아리 활동으로 몇 번 방문한 적이 있지만 오로지 나를 위해서는 첫 방문이었다. 20~30분가량 느긋하게 걸으며 도착한 책방골목은 문이 죄다 닫혀 있었다. 내가 너무 일찍 온 탓이다.



그래서 걸었다. 보수동 근처 골목길과 주변 상점들, 가게 앞에 내놓은 작은 간판과 화분을 구경했다. 예전 같으면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며 구경했을 텐데 마음이 조금씩 조급해졌다. 몇 달 전부터 사고 싶었던 책이 순식간에 누군가에게 팔려나가는 상상을 계속했다. 게다가 '검색 결과가 잘못되어 서점에 책이 없으면 어떡하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이렇게 대책 없이 걷기만 하는 행동이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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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러하듯 내 걱정이 비이성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분명 보수동 책방골목 홈페이지에서 △△ 서점에 사려는 책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보고 온 뒤다. 서점 문만 열리면 바로 살 수 있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 지난 수년 동안 팔리지 않은 책이(물론 정확한 기간을 확신할 수 없지만) 내가 사려는 그날 오전에 팔릴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지 않은가? 더구나 검색 결과 내용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도 낮다.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 늘 내게 주문하는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어때요?"를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괴로움이 조금 사라지는 듯했다.


그렇게 골목길을 조금 둘러보고 오전 10시쯤 다시 돌아왔다. 여전히 문을 열지 않은 서점이 태반이었다. 유일하게 문을 연 OO서점 주인분에게 "여기는 몇 시에 문을 여나요?"라고 여쭤보았다.

그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더니 입을 열었다.

"11시쯤이면 열어요."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지나가려다가 내가 찾는 책 제목을 말씀드렸다. 그는 이곳에 없다고 말했다.


그래, 그렇지. △△서점에 있다고 했으니 거기로 가야겠지.


나는 다시 어디로 가야 하나 잠시 고민을 했다. 앞으로 1시간을 더 보내야 한다. 국제시장과 깡통시장, 남포동 일대를 열심히 걸은 뒤 점심까지 사 먹고 12시 반 무렵에야 돌아왔다.




책을 너무 비싸게 주고 산 것일까?


점심을 먹으며 시간을 확인하니 12시 10분이 넘었다. 적어도 12시 40분 무렵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야 한다. 그런데 난 아직 밥을 먹고 있고 서점에도 다시 들러야 한다. 목구멍이 막혔다. 꺽꺽거리며 밥을 밀어 넣기 힘들었다. 결국 남은 밥을 제대로 먹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에서 나오니 날은 개서 한낮의 열기가 정수리에 내리 꽂혔다. 밥을 남겼지만 배는 불렀다. 다행이다 생각하며 보수동 책방 골목길까지 내달렸다. 650m쯤 되는 거리를 5분 만에 돌파했다.


내가 미리 알아둔 △△서점으로 직행했다. 불행히도 내가 사려는 책 가운데 한 권밖에 없었다. 나는 혹시 몰라서 책방골목에서 제일 커 보이는 ##서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홈페이지에 검색해도 있지 않은 책이 막상 오프라인 매장에는 있었다. 운이 좋다고 생각하며 나머지 책 두 권을 사서 서점에서 나왔다.


20220615_140548.jpg 모두 법정스님의 저서이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가방에 책을 넣는데 책을 너무 비싸게 주고 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괴로웠다. 오래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지만 말이다.




끝없는 괴로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괴로움을 쉽게 떨쳐낼 수 없었다. 책을 사기 전에는 책을 구할 수 있을지 걱정했고, 책을 사고 난 뒤에는 책값이 너무 비싼 게 아닐까 노심초사했다. 걱정하니 마음이 괴로웠고 괴로우니 무엇을 해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 산 책의 내용이 마음에 차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근심이 뒤따랐다. 무엇을 해도 괴로움이 생겼다.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날 저녁에 아주아주 낡은 책 두 권의 표지를 두꺼운 종이로 감싼 뒤 손에 잡히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출가 생활은 힘들어 즐거움을 얻기 어렵다
집에서 사는 것도 힘들고 괴롭다
마음에 안 맞는 무리와 사는 일도 또한 괴롭다
무엇을 찾아 나서도 괴로움을 만난다
그러므로 방황하는 나그네가 되지 말라
그러면 고통에 떨어지지 않으리라

- 법정 스님 『진리의 말씀』 중에서
경전에서 단 한두 마디라도 눈을 번쩍 띄워주는 교훈을 얻어들을 수 있다면 그것은 평생을 두고 살아가는 데에 길잡이가 될 것이다.

- 법정 스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비본질적 삶의 틀에서 벗어나는 용기' 중에서


『진리의 말씀』은 '법구경'의 내용을,『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은 경전 '숫타니파타'의 내용을 옮긴 것이다. 특히,『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은 경전 내용이 먼저 제시되고 스님의 강론이 뒤따른다. 단숨에 읽을 책도 아니고 곁에 두고 오래 읽을 책이다.


나는 내 비이성적인 사고를 수정했다.


책을 사기 전에 책을 살 수 없을까 봐 근심했다. 하지만 책을 손에 넣었다.

책을 살 때에는 책값이 너무 비싸다고 근심했다. 하지만 더 비싸도 아마 샀을 것이다. 꼭 읽고 싶었던 책이니까.

그러면 마지막 근심, 책의 내용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어떡하지? 그건 스님의 말씀처럼 단 한 두 마디라도 눈을 번쩍 뜨게 만드는 구절을 찾았기 때문에 더 이상 걱정할 일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괴로움이 조금 더 사라졌다.


애초에 내 괴로움은 본질에 가치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책의 소유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었기 때문에 생기는 걱정이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책을 통해 스님이 내게 전달하는 가르침이었고 스님은 내가 이런 괴로움 속을 오랫동안 헤매는 것을 어리석다 말씀하실 테지.


나는 더 이상 근심하지 않기로 했다. 괴로움이란 것이 마음을 바꾼다고 단번에 사라질 녀석은 아니다. 하지만 마음을 돌리면 차츰 나아진다. 앞서 말했듯이 사람은 사건이 일어나면 선택을 한다. 그 순간에 생긴 감정은 어찌할 수 없지만 그 감정을 어디까지 끌고 가느냐는 선택의 영역이다. 나는 걱정과 근심을 그만두기로 선택했다. 그리고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소파에 앉아 스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책을 읽어나갔다. 책을 곁에 두고 오래오래 읽을 나 자신을 떠올리면 소중한 인생의 길잡이를 만난 듯이 반갑고 신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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