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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키 리리 Dec 12. 2022

우울증과의 싸움에서 버티다

 

우울증이나 조울증을 앓는 사람이 주위에 민폐를 끼쳤다는 내용의 글을 브런치에서 읽었다. 글을 쓴 사람은 상대방이 병에 걸려서 그런 짓을 했다고 썼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 일반화하는 내용에 슬그머니 화가 났다. 그 사람이 우울증에 걸리든 걸리지 않든 본인의 성격상 문제 때문에 남에게 폐를 끼쳤다고 생각했다. 


그 글을 읽고 스스로를 점검했다. 내가 우울하다고 당일에 약속을 취소하거나 누군가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치거나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거나 이해 못 할 소리를 늘어놓은 것은 아닌가. 적어도 직장생활에서는 이런 적이 없었다. 자존감은 밑바닥이지만 그나마 자존심과 책임감은 강했다. 그래서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업무를 펑크 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우울증과의 싸움에서 나가떨어지지 않고 감정이 끓어오르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내게 남은 최소한의 자존심과 강한 책임감은 우울증과의 싸움에서 의외로 도움이 되었다. 


2019년, 두 번째 우울증 삽화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심각한 상태였다. 업무는 많았고, 둘째 녀석은 아팠다. 병가를 내고 학교를 쉬어야 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교사가 갑자기 병가를 내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당장 수업할 강사를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동료 교사들이 보강을 들어간다. 교무부에서는 시간강사를 구하기 위해서 교육청 인력풀을 뒤지며 전화를 백방으로 돌린다. 시간강사와 기간제 교사 채용은 내 업무였기 때문에 내가 병가에 들어간다면 아마 교감선생님이나 교무부장님이 그 일을 대신했겠지. 나는 우울증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아니,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치는 걸 병적으로 두려워했다.


어쩌면 그 마음 덕분에 우울증과의 싸움에서 가까스로 직장 생활을 영위하며 지내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앉아 쉬어야 할 의자를 스스로 걷어찼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첫 번째 정신과 의사는 내가 책임감이 무척 강한 사람이라고 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나가떨어졌을 만한 상황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가정을 영위하고 애 둘을 키우고 있었으니까. 당시 나는 고향을 떠나 연고 없는 곳에서 애 둘을 낳아 키우고 있었다. 젖먹이와 어린이집도 가지 않는 3살짜리를 혼자 돌보는 일이 가능할까. 아이 돌봄 서비스도 이용해봤지만 집에 누군가가 오는 것이 불편해서 며칠 이용하고는 그만둬버렸다. 신기한 것은 그 당시의 기억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도 사진첩을 보면 눈물만 난다. 그 시절을 버틴 건 오로지 내 책임감 덕분이었다.


뒤집어 생각하면 이 책임감 때문에 병원 치료를 미루고 약 복용을 늦췄다. 누군가에게 도와달라고 말하지 않았고, 도움받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혼자서 모든 일을 껴안을 수 없었지만 실제로 그렇게 했고 치료 시기를 놓친 나는 강산이 한 번 변할 시간만큼 병을 안고 산다. 




살면서 수 없이 많은 시간 동안 내가 앉아 쉬어야 할 의자를 걷어차며 지냈다. 버티고 견뎠다. 책임감, 의무감, 자존심. 이런 말로 나에게 쉼을 주지 않았다.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가끔은 아주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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