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혼자 늦은 점심으로 떡국을 먹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의자에서 튀어올라 현관을 바라보니 부모님이 어마어마한 박스를 들고 계셨다. 하나씩 살펴보았다. 사과 한 박스, 귤 한 박스, 소고기 2kg, 돼지고기 2kg, 어묵 5인분, 요구르트 20개. 식구라고 해 봐야 어린이 둘과 성인 여성 1명. 남편은 주말에만 집에 오니 많이 못 먹는다. 저걸 어떻게 다 먹지? 머릿속이 어지러우면서 토할 것 같았다.
"트레이더스에 장 보고 오면서 좀 더 샀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이마트 트레이더스는 내가 잘 가지 않는다. 소품종 대용량으로 팔기 때문이다. 과일은 아마 과일 가게에서 따로 사신 듯했고, 나머지는 트레이더스 거. 부모님은 우울증에 걸린 딸이 잘 못 챙겨 먹고 만날 잠만 잔다고 걱정이 크셨다. 가끔 장을 봐주시긴 하지만 이렇게 많이 사 오신 적은 잘 없었다. 물론 사주시면 감사히 잘 먹지만 이상하게 이 날따라 감사하다는 말도, 잘 먹겠다는 말도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20개가 넘는 사과를 하나하나 옮겨서 냉장고 과일 칸에 넣는 일, 귤이 다 썩기 전에 부지런히 먹어야 하는 일, 고기 4kg을 소분하여 냉동실에 넣는 일, 사 오신 모둠 어묵 가운데 아이들이 못 먹는 매운 어묵을 따로 골라내는 일, 비닐로 칭칭 묶인 요구르트의 포장지를 벗겨 낱개로 냉장고에 넣는 일. 이 모든 것이 거대한 짐처럼 느껴졌다.
일전에도 썼지만 미용실도 몇 달째 안 가고 있다. 핸드폰을 들어 전화번호를 검색하고 전화를 걸어 예약시간을 잡고 약속한 날에 버스를 타고 미용실에 가는 이 모든 일이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 같아서 도저히 시도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위에 언급한 일도 마찬가지였다. 한꺼번에 닥친 엄청난 일에 나는 점점 더 어지러웠다. 저걸 어떻게 다 하지? 속이 점점 더 메스껍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걸 쳐다보고 있으니 징그러운가 보다."
아버지가 걱정스럽게 입을 떼셨다. "우리 얼른 갈게. 천천히 정리하렴."
나는 엄마가 좋아하는 대추야자 초콜릿을 가까스로 챙겨드렸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다시 끈으로 심장을 조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재작년 여름, 수박을 자를 때의 기분이 되살아났다. 수박 한 덩이를 씻고 큰 칼로 사각 썰기로 잘라 통에 집에 넣으면서 수박이 왜 이리 크냐고, 수박이 빙하처럼 단단하다고, 난 왜 이리 힘이 없냐고 한탄했었다. 수박 자르기는 내가 영영 짊어져야 할 짐 같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 같았다.
그해 여름, 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정신과에 갔다. 내 상태가 심각하다는 이야기를 의사에게 전해 들으신 부모님은 굳은 얼굴로 진료실 문을 나오셨다. 내 우울증이 유년시절, 혹은 유아기의 정신적 외상 때문이라는 사실을 부모님께 말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대신 내가 약해서 우울증에 걸린 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내가 약해서 수박을 자를 수 없는 게 아니었다. 그 누구의 탓도 아닌 그저 수박이 단단해서 그런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부모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 자신이 서글펐다. 이토록 노력하고 애쓰시는 부모님 앞에 나는 즐거운 표정도, 행복한 표정도 짓지 못해서 슬펐다. 나는 그들에게 짐일 리가 없지만 분명 짐처럼 느끼게 행동했고, 노년에 접어든 그들의 삶에 유일한 걱정거리임에 틀림없었다.
힘을 내야지, 전진해야지.
나는 내 마음을 다 잡고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또다시 나와 싸웠다. 내가 이 모양 이 꼴로 살아서 되는 일도 없다는 위태로운 생각을 떨쳐버리고자 애썼다. 애를 쓰고 싸우고 버티고 견디고-. 부모님이 집으로 돌아가신 뒤 나는 음식과 과일을 정리하면서 다시 주저앉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저녁 여덟 시. 아이들과 넷플릭스에서 '징글쟁글'이라는 영화를 같이 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아버지였다. 나는 명랑하게 전화를 받았고, 이내 그가 왜 전화했는지 알아차렸다.
"주신 고기로 돼지불고기 해 먹었어요. 애들이 잘 먹더라고요. 지금은 영화 봐요."
전화기 너머 안도의 한숨이 들렸다.
"다음 주에 집에 한 번 들를게요. 애들 데리고요."
아버지가 좋아하셨다.
나는 통화를 끊고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쟁글 할아버지가 어린 손녀 저니를 껴안고 좋아하는 모습이 보였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잘 보낸걸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스스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