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난 여름 1

by 키키 리리

여름 장마가 길어지고 있었다.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장맛비는 하교할 무렵에도 그칠 줄 몰랐다. 슬은 중앙 현관에 서서 손을 앞으로 뻗었다. 손바닥 위로 빗방울이 동그랗게 모였다. 슬은 촉촉하게 젖은 손바닥으로 뺨을 문질렀다.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이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그래야만 살 수 있다는 듯이.


슬은 느릿느릿 걸었다.


우산을 쓴 학생들이 버스 정류장을 향해 뛰거나 재빨리 집을 향해 걸어갈 때도 슬의 발은 무거운 추를 매단 것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발밑에서 물이 번졌다. 슬은 물웅덩이를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밟았고, 바람에 나뭇잎이 날려도 손으로 휘젓지 않았다.


“이것도 몰라?”


소시지가 손을 번쩍 들었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하늘이 빙글빙글 돌았다. 원시 지구의 형성부터 최초의 생명체가 출현하기 전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라는 그의 물음에 슬은 대답하지 못했다. 분홍 소시지처럼 팔뚝이 굵고 우악스러운 과학 선생은 수업을 듣던 학생들에게 쉴 새 없이 질문을 퍼붓기로 유명했다. 학생들이 잠시라도 대답을 머뭇거리면 어김없이 손이 날아왔다.


슬은 쉬는 시간에 읽기 시작한 언플러그드 보이에 빠져 종이 울려도, 교실에 선생님이 들어와도 만화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소시지는 이런 슬의 모습을 낚아챘다.


슬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서 빗방울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교복 치마가 비에 젖어 허벅지에 달라붙었고 반소매 와이셔츠에선 빗물이 그대로 흘러내렸다. 슬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발을 쳐다보았다. 발길 닿는 대로 아무렇게나 걷고 싶었다. 애써 온 길을 되돌아가고 싶었고, 눈앞에 놓인 길을 뛰어가 보고도 싶었다. 그러나 마음은 어디론가 떠나버려 껍데기만 남은 것 같았다.


그때였다.


“이슬!”


슬은 뒤를 돌아봤다. 여자애 하나가 빨간 우산을 든 채 뛰어왔다.


자신을 향해 누군가가 뛰어오고 있다.


슬은 미간을 찡그렸다. 무언가에 몰두하거나 낯선 상황에 처할 때마다 생기는 그의 버릇이다.


“넌 왜 그렇게 사람을 빤히 보니?” 낯선 이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슬은 대답하지 않았다. 누구길래 나를 부르고 자신을 빤히 쳐다본다고 묻는 걸까? 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니 분명 우리 학교 학생이 맞는데 슬은 어디에서도 본 기억이 없다.


그는 자신을 유리 친구인 혜나라고 소개했다.

유리, 유리.

슬은 미간을 더욱 찡그렸다.

유리는 작은 키에 피부가 까매서 까갈이라는 별명을 가진 애였다. 까만 갈비.


“너 한신 아파트에 살지? 나도 거기 살아.”


혜나의 목소리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우산 같이 쓰자.”


혜나는 성큼 다가왔다.


슬은 한걸음 물러섰다.


“유리를 보러 5반에 갈 때마다 맨 뒷자리에 앉은 너를 봤어. 항상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더라. 네 이름은 유리에게 물어봤고. 집은 뭐……같은 방향이니까.”

이 정도면 우산을 같이 쓸만하지 않냐는 뉘앙스였다.


“가방 안에 우산 있어.” 슬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런데 왜 안 써?”


“그냥.”


“비를 맞고 싶은 거야?”


“아니, 가방에 든 우산을 꺼내기 싫었을 뿐이야.”


“너 참 신기한 애다.”


둘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우산 쓰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혜나는 이렇게 말하며 슬의 곁을 성큼성큼 지나쳤다.


슬은 빗속에서 점점 멀어지는 혜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집에 돌아온 슬은 고모에게 잔소리를 잔뜩 들었다. 가뜩이나 몸이 약한데 비를 맞고 다니면 어쩌냐고, 네 아빠가 알면 무척 속상할 거라고 그 끝도 없는 잔소리를 다 들은 뒤에야 욕실에 들어가 씻고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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