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은 토요일 하굣길에 맞은 비로 여름 감기에 걸렸다. 어쩔 수 없이 학교를 며칠 쉬었다. 약을 먹고 침대에 누워 음악을 들었다. 워크맨에 윤상과 노댄스, 유재하, 여행스케치의 테이프를 번갈아 끼우며 잠을 청했다. 고모가 방문을 열 때마다 슬에게 좀 나아졌냐고 묻는 바람에 계속 자는 척을 해야 했다.
허리가 아파서 이리저리 뒤척였다. 책을 볼까 고민하다가 기력이 없어서 누워만 있었다.
“너 참 신기한 애다.”
문득 혜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참 듣기 좋은 목소리라고 슬은 생각했다.
다시 학교에 갔을 때 친구들은 슬에게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에 늘 이어폰을 꽂고 사는 슬에게 친구들은 쉽게 말을 걸 수 없었다. 섬처럼 고독했지만 대신 평온했다. 마음은 늘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고요하게 흘러갔다.
3교시 쉬는 시간에 도시락을 까먹고 점심시간에 뒷동산에 올라갔다. 여름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슬은 나무 밑 벤치에 길게 누워 손을 뻗었다. 하늘이 한 손에 잡힐 듯 가까이에 있다가 점점 멀어졌다.
예비종이 울릴 무렵에서야 슬은 슬그머니 벤치에서 일어나 교실에 들어갔다. 자리에 앉으려는데 쪽지 하나가 보였다. 종이를 길게 접고 다시 세 번 꺾어 만든 쪽지.
슬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유리가 다가오더니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혜나가 너한테 주라더라.”
유리는 쪽지 내용이 궁금한지 계속 슬을 힐끔거렸다.
슬은 유리에게 자리로 돌아가 달라고 말하는 대신 교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곧 5교시 시작종이 울렸다.
유리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석식을 먹고 저녁 야자까지 모두 마친 뒤에야 슬은 쪽지를 펴보았다.
- 괜찮니?
그게 전부였다.
슬은 쪽지를 다시 접어 수학책 사이에 끼워놓았다.
종례 후 어둑어둑한 밤길을 서둘러 걸어가고 있는데 서점 앞에 혜나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슬은 혜나가 무슨 말을 걸까 봐 워크맨의 소리를 줄였다. 풀벌레 소리가 작아졌다. 이어폰에서는 여행스케치의 별이 진다네가 막 나오던 참이었다.
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이슬.”
혜나가 슬을 불렀다.
“내가 준 쪽지 읽었니?”
슬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이슬. 이어폰 좀 빼줄래?”
“알았어.”
“쪽지 읽었어?”
“응.”
“답은?”
“뭐가?”
“내가 물었잖아.”
“읽었어.”
“이제 괜찮아?”
“그런 것도 같아.”
“그런 말이 어딨어? 괜찮으면 괜찮다, 아니면 아니다. 이렇게 말하라고.”
“글쎄…….”
“집까지 같이 갈래?”
슬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혜나의 보폭에 맞춰 걷기 시작했다.
혜나는 슬이 묻지도 않은 말을 잘도 해댔다. 혜나는 2반이고, 한신 아파트 103동에 살았다. 유리랑은 중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냈다.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도 여전히 잘 지낸단다. 같은 반이 아니라서 아쉬울 뿐.
“왜 만날 음악을 들어?”
“그냥.”
“무슨 음악을 주로 듣는데?”
“가요.”
“H.O.T? 젝키?”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어떻게 알아? 네가 대답을 안 하는데.”
“뭐가 궁금한데?”
“이것저것.”
혜나는 킥킥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네가 궁금해.”
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후덥지근한 여름밤 공기가 둘 사이를 지나갔다.
곧 아파트 입구가 보였다.
“내일도 널 볼 수 있겠지?”
“네가 원한다면.”
“넌 항상 대답이 그따위야.” 혜나가 웃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혜나는 슬을 기다렸다. 종례가 끝난 뒤 혜나가 5반에 오면 유리랑 셋이서 정문까지 나란히 걸었다. 그리고 정문에서 유리랑 헤어졌다. 유리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학교 정문에서 집까지는 20분쯤 걸렸고 그 시간에 혜나는 쉴 새 없이 입을 열었다. 오늘 하루 잘 지냈는지, 별일 없었는지 별 시덥잖은 물음과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혜나에겐 그 일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상이었지만 슬에겐 낯선 일이었다. 고모나 아빠는 슬에게 관심이 많아서 자주 묻긴 했지만 슬에겐 그게 혈연 관계에서 생겨난 의무 같은 거라고 느꼈다.
혜나는 달랐다. 별다른 이유 없이 슬에게 관심을 가졌다. 사실 혜나 나름의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따로 묻지는 않았다. 왜 나인지, 왜 하필 나인지, 그 많고 많은 OO여고 2학년 학생 가운데 왜 자신을 선택해서 말을 걸었는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