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 보충 수업이 모두 끝난 주말, 슬과 혜나는 버스를 타고 유리네 집에 갔다. 유리의 집은 산복도로 중턱에 자리 잡았다. 빨간 벽돌로 벽을 두른 2층 주택이었는데 마당에 서면 저 멀리 바다와 용두산 타워가 보였다.
유리의 집엔 아무도 없었다.
혜나는 이전에도 유리의 집에 와본 것처럼 익숙하게 움직였다. 유리에겐 중학생인 남동생이 있었는데 먹성 좋은 남매 때문에 그들의 부모는 항상 냉장고에 먹을거리를 잔뜩 넣어 두었고 부엌엔 과자와 빵이 한가득이었다.
“이런 날이 흔치 않지. 부모님이 동생만 데리고 외가에 갔어. 난 안 가겠다고 한사코 거절했단다. 다 너희들을 위해서야. 알지?” 유리가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원래 슬은 초대받지 못했다. 슬에게 자신의 절친을 빼앗겼다는 생각 때문인지 유리는 둘만 있으면 틱틱거렸다.
이번에도 혜나가 유리를 설득했을 것이다. 난 둘 모두를 사랑하는데 한 명이 빠지면 섭섭하다고 말하면서.
거실 소파에 앉아 수박을 와그작와그작 베어 먹으며 다가올 날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유리는 패션디자인에 관심이 많아 의류학과에 진학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엄마가 하는 옷가게를 물려받을 거라고. 혜나는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여전히 모르겠다며 목표를 정한 유리를 부러워했다.
이윽고 둘의 시선이 슬에게 꽂혔다.
“왜?”
“이슬! 넌 어때?”
“뭐가?”
“또 모르는 척한다.”
“정말 모르겠어.”
“집에선 뭐라고 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셔.”
“누가? 엄마가?” 혜나가 묻자 슬은 대답을 머뭇거렸다.
슬의 부모는 슬이 3살 때 이혼했다. 슬의 기억 속에 엄마의 존재는 없었다. 그 자리를 고모가 메꾸긴 했지만 그렇다고 엄마가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말해주지 않는 아빠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설거지를 끝낸 유리가 비디오테이프를 플레이어에 넣었다. 잉글리쉬 페이션트. 무려 2시간 40분짜리 영화였다.
“청소년 관람불가인데 어떻게 빌렸어?” 혜나가 눈이 휘둥그레지며 말했다.
“다 방법이 있지. 너도 볼 거지?”
슬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조용히 그들 곁에 앉았다.
영화는 지루했다.
유리와 혜나가 눈물을 흘릴 때 슬은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억지 눈물이라도 흘려볼까 했지만 도저히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왠지 이러고 있는 게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이 정도의 거리에서, 서로의 다른 점을 절실히 느끼며 너는 거기서 울고 나는 여기서 눈을 감고 있다.
무더운 8월의 오후였다.
거실 전면 유리창을 가린 커튼 사이로 강렬한 햇살이 비집고 들어왔다. 끈적끈적한 땀이 목덜미와 겨드랑이 사이에서 흘러내렸고, 오래된 선풍기가 탁탁거리며 돌아갔다. 왠지 낯선 곳에 던져진 것 같았다.
슬은 가물가물 잠에 빠져들었다.
한참 뒤 슬그머니 눈을 떴을 때 유리와 혜나가 서로에게 기댄 채 잠든 장면을 보았다.
슬은 저들과 함께 보낸 두 달 남짓의 시간을 떠올렸다. 고요하게 흐르는 강물이 조금씩 몸을 뒤틀며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너무나 평온한 모습 속에 무방비상태로 잠든 아이들을 보니 이 장면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이 시절을 회상했을 때, 분명 그리워할 거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확실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