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영준아.
늘 그러하듯 ‘안녕’이란 말로 시작하네. 이 편지의 마지막도 ‘안녕’으로 끝날 거야. 너에게 늘 ‘안녕’이란 말로 인사할 수 있어서 참 좋았어. 물론 우리가 헤어졌지만 그건 그 누구의 탓도 아니야. 너는 너의 삶을 살아야 하고 나는 나의 삶을 살아야 하니까. 다만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늘 하지 못하고 남겨두는 바람에 마음이 항상 무거웠어.
그런데 이렇게 차가운 겨울밤에 너와 자주 듣던 음악을 들으니 네 생각이 나더라. 밤에는 편지를 쓰면 안 되는데……. 아침이 되면 늘 후회하니까.
언젠가 네가 나에게 이렇게 물었던 거 기억나? 물에 빠진 남자를 보고 왜 울었냐고. 난 기억나지 않는다고 대꾸했지만 그건 거짓말이었어. 난 아빠 생각이 났던 거야. 돌아가신 우리 아빠. 내가 겨우 일곱 살이 되었을 무렵, 아빠가 돌아가셨어.
예전에 너에게 아빠의 죽음과 관련된 일을 간단히 말한 적은 있지만 자세히 이야기하지는 않았어. 시간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늘 고통스럽고 마음이 무거워. 아니 마음이 무거워진다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 가슴이 찢기는 듯한 아픔.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슬픔 같은 것. 무슨 표현으로 내 심정을 대변할 수 있을까? 아마 없을 거야.
태풍이 치던 밤은 몹시 무서웠어. 나는 번쩍번쩍하는 번개와 땅을 뒤흔드는 천둥소리에 잠을 잘 수가 없었어.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린 채 “엄마, 엄마”를 수 차례 외쳤지. 안방에 있던 엄마가 내 방으로 들어왔을 때 산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어. 거대한 흙더미와 바위들이 아빠가 주무시던 방과 거실로 밀려왔어. 무너진 벽과 흙더미 틈에서 아빠를 찾을 수 없었어. 아빠의 옷자락과 손가락 끝마저도.
그렇게 나는 아빠를 잃었어. 하지만 엄마가 내 곁에 남아 있었지. 우리-엄마와 나 말이야-는 늘 함께 했어.
나중에 엄마가 말씀하셨어.
네가 나를 구했구나, 윤희야.
삶은 참 이상해.
아빠가 돌아가셨지만 나는 아빠의 죽음은 그것대로 남겨두고 내 삶을 살기로 결심했어. (물론 내가 아빠를 잊었다거나 아빠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야.) 그리고 슬플 때는 슬프다고 말하고 기쁘면 기쁘다고 이야기해. 감정에 충실해지면 아주 힘든 순간도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겨. 아주 간단한 거야.
넌 우리가 처음 만났던 순간과 두 번째 만났던 순간에 느끼고 있었던 감정에 대해 말하지 않았어. 그리고 그런 감정이 발생하게 된 장면에 대해 단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어. 그것이 네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고, 우리가 함께 다니던 그 시간 내내 네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도 난 알고 있었어.
나에게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런데 넌 너무 외로워 보여.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너에겐 위로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어. 과거를 놓아버리란 뜻은 아니야. 하지만 그 일을 그 일대로 내버려 두고 네 삶을 앞으로, 앞으로 밀어내면 좋겠어. 문득 이 말을 하고 싶어 편지를 쓴 거야. 너와의 거리는 점점 벌어질 테고 언젠가 이런 말을 할 기회조차 잃어버리면 난 마음이 몹시 아플 거야. 그래서 더 늦기 전에 편지에 적어두는 거야. 그러니 네가 내 편지를 꼭 읽었으면 좋겠어.
아직은 너에게 애정이 남아 있나 봐.
여행 다녀오면 연락할게.
안녕.
윤희는 2009년 겨울에 이 편지를 썼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에게 부치지는 못했다. 나는 윤희의 편지를 손에 꼭 쥔 채 침대 위에 누웠다. 머리가 아파서 도저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잠시 후 가슴 저 밑바닥 어디선가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고 올라오더니 기어이 눈가로 비집고 나왔다. 나는 오른팔을 들어 두 눈 위에 갖다 댔다. 그리고 도서관 열람실에서 윤희가 내 손을 잡아주던 순간을 떠올렸다. 부드럽고 따뜻한 윤희의 손이 내 손에 닿았던 순간을. 나는 양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그 순간을, 그 장면을, 윤희의 손을 통해 전해지던 온기를 다시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움켜쥐자 손가락 사이로 스르륵 빠져나간 모래알처럼 윤희에 대한 기억이 모두 사라지기 전에.
그러자 비로소 윤희가 내 곁에 없음이 실감 났다. 이제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고 그녀의 손도 잡을 수 없으며 말을 건넬 수도 없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슬픔을 억누르며 그녀의 부고를 전하던 윤희 어머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듯했다. 내가 어디론가 밀어내고 떠나보낸 감정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이 슬픔을 무엇에 비할 수 있을까.
나는 소리를 내어 커다랗게 울기 시작했다. 이제껏 난희를 위해, 내 죄를 위해, 내 슬픈 삶을 위해 울었으나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온전히 윤희만을 위해, 더 이상 내게 이런 말을 건넬 수 없는 윤희를 위해 울었다.
아마 윤희가 내 곁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면 분명 이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삶은 항상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부유하는 먼지들처럼 내 삶은 그렇게 쉽게 끝나지는 않으리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