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5년 정도 연애를 했고, 그 뒤에 헤어졌다.
연애기간 동안 가끔 윤희네 민박집에 들러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식사를 했다. 윤희 어머니는 윤희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계셨다. 우아하고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나를 대하셨고, 무심코 던진 말에 내가 상처받을까 봐 늘 기민하게 살피셨다. 물론 윤희가 어머니에게 내 가정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탓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녀의 어머니를 만나면 마음이 어느 정도 편안해졌다. 불행한 삶이 한 인간에 내려준 유일한 선물이 있다면 그것은 같은 종류의 인간을 대할 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윤희 아버지는 1987년 태풍 셀마로 발생한 산사태로 돌아가셨다. 윤희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난희 이야기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끝끝내 말하지 못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서로에게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존재한다.
윤희 말이 맞았다. 난 늘 해야 할 말도, 하고 싶은 말도 하지 못하고 산다. 그리고 항상 내일을, 미래를 걱정한다.
우리가 헤어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녀와 나는 짝이 맞지 않는 신발과 같았다. 그녀의 위로가 필요했지만 그뿐이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진 짐도, 죄책감도, 두려움도 그 무엇 하나 덜어낼 수 없었다.
대학을 졸업한 나는 창원에 있는 전자회사에 취직을 했고, 윤희는 대학원에 진학을 하였다. 헤어진 뒤에도 가끔 만나 밥을 먹곤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만나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윤희는 서른 살이 되자 아프리카로 여행을 갔고, 남아공에서 경비행기 추락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윤희의 부고를 듣고도 한참 동안 슬픔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서 슬픈 것이 아니라 내 삶이 결국은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는 짙은 패배의식 때문이었다.
몇 년 뒤 윤희의 어머니가 연락을 하셨는데 윤희가 남긴 편지가 있으니 찾아가라고 하셨다. 아프리카로 여행 가기 전에 쓴 편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남편과 자식을 모두 사고로 잃은 그녀의 어머니를 도저히 만나 뵐 자신이 없었다. 내가 망설이며 대답을 머뭇거리자 윤희의 어머니가 회사 기숙사 주소를 물어보셨다.
그렇게 내 앞에 도착한 윤희의 편지를 책상 서랍 안에 넣어둔 채 한동안 잊고 지냈다. 윤희가 무슨 말을 남겼을지 몹시 궁금했지만 막상 편지를 꺼내 읽을 자신이 없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윤희의 편지를 읽으면 마음이 약해지리란 사실을. 나는 계속 이렇게 마음의 짐을 진 채로, 난희와 함께, 죄책감에 허덕이며 그렇게 살아야 했다. 내게 남은 날들은 내가 예상한 미래와 정확하게 겹칠 것이고 과거의 내 가족이 그러했듯이 아무도 나를 돕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바꿀 마음도, 바꿀 여력도 없었다. 삶은 그저 고통일 뿐.
그러다가 윤희의 편지를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윤희 어머니 때문이었다. 그분은 자식이 남긴 마지막 편지의 내용을 궁금해하셨다. 휴대폰 너머로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어머니의 숨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결국 6월의 어느 일요일 오후에 서랍 안에서 편지를 꺼냈다. 초록색 봉투 안에서 편지지를 꺼내 펼치자 윤희의 얼굴을 닮은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발끝을 세워 날렵하게 뛰어다니는 글자들이었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서둘러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