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다음 수업부터 윤희는 강의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혹시나 윤희가 나타날까 봐 수업시간마다 연신 강의실 입구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예상은 번번이 빗나갔다. 윤희가 나에게 호감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끝없이 펼쳐질 우울한 미래에 ‘윤희’라는 존재가 들어올 자리는 없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게다가 나에게는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 죽을 때까지 짊어져야 할 짐이 있었다.
난희의 죽음 앞에서 벼랑까지 몰린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엄마는 죽음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났으며 아버지는 맞서 싸우기보다 외면하는 편을 택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남동생은 아마도 형이 자신을 버렸다고 원망하며 살아갈 테지.
그럼 나는? 이 모든 비극을 만든 사람은 나니까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할까? 그놈의 얼굴은 정말 기억조차 나지 않고 난희가 타고 떠나버린 봉고차도 무슨 색이었는지 모르겠다. 이제 와서 경찰서를 찾아간들 뭘 바꿀 수 있을까. 과거는 바꿀 수 없고 내가 한 짓 역시 되돌릴 수 없다. 윤희는 결코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윤희의 따스함이 그리웠다.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 느껴지던 온기. 1997년의 윤희가 ‘미치도록 필요했다’고 말한 그것을. 나 역시 그녀와 다르지 않았다.
결국 나는 기말고사 후 윤희에게 연락을 하였다.
내 전화를 받은 그녀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꽤 오래 걸리네.”
“……어디서 만날까?”
“학교가 편해.”
“그래. 그렇게 하자.”
“그나저나 대답할 준비는 된 거야?”
“글쎄……만나서 이야기할게.”
우리는 학교 중앙도서관 앞에서 재회했다. 작은 보라색 꽃들이 자잘하게 프린트된 양산을 든 윤희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는 심각한 내 표정을 보더니 얼굴에서 장난기를 싹 거두고 조용히 다가왔다.
나는 그녀에게 도저히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열람실로 가자고 제안했다.
“거기서 어떻게 이야기해?”
“이야기 안 할 거야. 쓸 거야.”
“쓴다고? 뭘? 내게 할 말을?”
“그래. 종이 위에 쓸 거야.”
“뭔가 맘에 들진 않지만…… 왠지 네가 중요한 이야기를 할 것 같으니 그냥 따라갈게.”
우리는 2층 열람실에 들어간 뒤 각자 읽을 책을 서가에서 가져와서 나란히 앉았다. 나는 밀란 쿤데라의 ‘농담’을, 윤희는 영어회화 책을 뽑아왔다.
“너, 밀란 쿤데라가 누군지 알아?”
“아니.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뽑아왔어. 제목이 마음에 들거든. 농담. 내 삶도 그냥 농담이었으면 좋겠어.”
뭔가 더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건너편에 앉은 여자가 자꾸 쳐다보는 바람에 대화가 끊기고 말았다. 나는 가방에서 노트와 볼펜을 꺼내 윤희에게 할 말을 적기 시작했다. 윤희가 힐끔거리며 쳐다보았지만 나는 별다른 제스처를 취하지 않았다.
나는 노트 위에 부모님의 이혼과 엄마의 죽음에 대해 적기 시작했다. 대신 내 감정에 대해서는 최대한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내 마음 상태에 대해서 구구절절 쓰기 시작하면 그 원인에 대해서도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난희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내가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난희를 죽음으로 내몬 나를 이해해 달라는 것이지만 그녀가 나를 떠날까 봐 두려웠다. 우리 가족조차 나를 죽일 놈, 범죄자 취급하며 나를 비난했는데 그녀라고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이렇게 내게 가까이 다가온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정말 외로웠고 누군가의 위로가 절실히 필요했다. 이렇게 살기는 싫었다. 이렇게 살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변치 않는 미래라면 앞으로 펼쳐질 내일이 고통뿐이라면 어떤 식이라도 내가 숨 쉴 구멍은 만들어야 했다.
내가 쓴 노트를 다 읽은 윤희는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아주었다. 그녀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 작은 움직임이 가지고 있는 힘을 알고 있었다. 윤희는 내 손을 잡은 채 자기 앞에 있는 영어회화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한참 후에 내 얼굴을 쳐다보며 소리 내지 않고 말했다. 윤희의 입모양은 “고.마.워.”라고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