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는 내가 대학교 1학년이던 2000년 봄, 교양 강좌 수업에서 처음 만났다. ‘창의적 사고와 글쓰기’ 수업 시간이었는데 소설 ‘상실의 시대’를 전공 서적과 함께 들고 나타났다.
하얗고 갸름한 얼굴과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를 한 여자였다. 대다수의 남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전형적인 미인으로 그녀가 강의실에 나타나자 의자에 앉아있던 남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그녀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내 옆자리로 직행했다. 연노란색의 얇은 원피스 위에 하늘색 재킷을 걸친 그녀는 매혹적이었다.
윤희가 가방에서 반짝거리는 머리핀을 꺼내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를 묶어 올리자 강의실이 술렁거렸다. 나는 나와 윤희를 번갈아 보며 수군대는 녀석들이 신경 쓰였다. 교수님이 들어오시기 전에 얼른 자리를 옮기려고 일어서는데 그녀가 말했다. “왜?”
놀란 내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앉아. 교수님 오신다.”
윤희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로 앞쪽을 가리켰다. 어느새 강의실로 들어오신 교수님이 출석부를 뒤적이고 계셨다.
윤희는 강의를 듣는 대신 가져온 책을 노트 사이에 교묘하게 숨겨 읽기 시작했다. 나는 곁눈질로 윤희를 훔쳐보면서 우리가 아는 사이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처음 보는 남자에게 대뜸 반말을 하는 여자는 흔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리저리 생각을 해도 어떤 희미한 윤곽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수업이 끝난 뒤 윤희에게 나를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별 질문을 다한다는 투로 책을 읽고 싶은데 구석 자리가 거기밖에 없어서 왔노라고 대꾸했다. 그러면서 오늘 점심 약속이 없으면 같이 밥을 먹고 싶다고 말했다.
“요 아래 쌍비에 가자.”
윤희의 말투는 대담했고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아니, 갑자기 점심은 왜?”
“일단 쌍비에 가자. 그럼 알게 될 거야.”
“쌍비?” 내가 되묻자 윤희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몰라? 쌍비? 두 대의 비올라. 데이트한다는 남녀들이 한 번씩은 간다는 레스토랑.”
윤희는 책상 위에 놓인 책들을 천천히 정리하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친숙한 사람이나 강아지 따위를 쳐다보듯이 부드럽고 온화했다. 나는 별달리 할 일이 없었고 오후 수업까지 2시간 정도 남았기 때문에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윤희가 ‘쌍비’라고 부른 곳은 어두컴컴한 불빛 아래 놓인 그랜드 피아노가 인상적인 자그마한 레스토랑이었다. 윤희는 내 의사도 묻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음식을 주문하고는 이 집에서 가장 맛있는 요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을 영문과 1학년 도윤희라고 소개한 뒤 나를 이전에 딱 두 번 본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1997년 7월과 2000년 2월. 너를 봤어.”
“나를 본 적이 있다고?”
“그래, 분명히 너야. 아까 너를 다시 만나게 돼서 얼마나 좋았는지!” 윤희는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다시 기억을 되짚어 보았으나 그녀의 얼굴은 없었다.
“미안하지만 난 너를 몰라. 오늘 처음 본 거야.”
나는 삐걱대는 의자를 몸쪽으로 바짝 당기며 그녀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윤희는 정면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고 ‘너는 이제 나를 좋아하게 될 거야.’라는 유치한 내용을 곧 입 밖으로 낼 것 같았다.
“그럼 유감인데? 나같은 사람을 놓치다니.”
그녀는 나를, 영감을 불어넣을 뮤즈를 놓친 불운한 예술가쯤으로 생각하는 듯 했다.
“근데 무슨 일 있었어? 두 번 다 곧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앉아 있던데.”
윤희는 이렇게 말한 뒤 미간을 잔뜩 찡그려 내 표정을 흉내 냈다. 입술 양끝을 한껏 아래쪽으로 내밀고 자세마저 구부정하게 취한 바람에 꽤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글쎄……. 모르겠어.”
나는 윤희의 관심이 부담스러웠다.
“쳇, 너, 기계공학부 1학년 맞지?”
“뻔히 알고 있는 걸 왜 물어?”
“역시 난 기억력이 좋단 말이지. 지난달에 신입생환영회로 송정 민박집에 온 적 있지? ‘희야민박’이라고 기억 나?”
“희야민박?”
“그래. 희야민박.”
윤희의 말대로 지난달에 신입생환영회에 참석하기 위해 송정에 간 적이 있었다. 100번 버스를 타면 곧바로 송정까지 갈 수 있었는데, 학교와 송정은 양 끝에 위치한 종점이어서 거리가 꽤 멀었다. 하지만 학교 정문 앞에서 버스를 타면 자리에 앉아 갈 수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달리 다른 선택을 하지는 않았다.
“몇 십 명이나 되는 남학생들 가운데 넌 혼자만 뚝 떨어져 나와 평상 위에 앉아 있었어. 심지어 밥도 안 먹고, 술도 안 마시고. 그래서 너를 몰래 훔쳐봤어. 네가 우나 안 우나 내기를 했지. 엄마와 말이야. 난 내가 이길 것이라고 확신했어. 3년 전 여름에도 넌 울었으니까. 그런데 웬걸? 이번엔 끝까지 울지 않더라. 결국 학생들이 머물다간 방과 화장실 청소는 내 몫이 되었지.”
윤희는 내심 속상한 듯 말을 이어갔다. “그 민박집 주인이 우리 엄마야.”
윤희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꼼짝없이 3시간 동안 청소만 했다고 투덜거렸다.
당시 나는 누군가와 어울려서 떠들며 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대학생이 되면 으레 하는 일이라고 별 생각 없이 따라갔으나 내게는 맞지 않는 자리였다. 추운 마당에 몇 시간째 나와 있는 나를 잡아끄는 몇몇이 있었으나 밤이 깊어지자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새벽이 되자 나는 바닷가로 나갔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오랫동안 통곡했다.
“어, 음식 나왔다. 일단 먹자. 배고파.”
종업원은 우리 앞에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함박스테이크를 놓고 황급히 사라져버렸다. 그는 우리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서두른 것이 분명했다. 윤희는 재킷을 벗어 옆에 아무렇게나 던진 뒤 나이프를 들었다.
벌어진 윤희의 입술 사이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정말 맛있겠다.”
그녀는 고기를 듬성듬성 썰어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쩝쩝거리며 음식을 먹는 윤희의 모습과 하늘거리는 얇은 원피스는 짝이 맞지 않은 신발 같았다.
“원피스는 네 취향이야? 날씨가 아직 추운데.”
“으응? 원피스? 당연히 아니지. 난 원래 이런 거 안 좋아해. 이건 엄마 취향이야. 엄마가 안쓰러우니까 내가 그냥 입어주는 거야. 어려운 일 아니잖아?”
나는 왜 엄마가 안쓰럽냐고 묻고 싶었지만 주제 넘는 질문 같아서 입을 다물어 버렸다. 희미한 조명 아래 앉아 있는 윤희는 마치 빨리 먹기 대회에 참여한 사람처럼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그녀의 턱과 뺨은 힘차고 건강했다.
“그렇게 쳐다보면 뭔가 떠올라? 너, 좀 웃긴다.” 윤희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친구 없지? 당연히 애인도 없을 테고, 혼자 학교 다니고 혼자 수업 듣고, 뭐 이런 생활 익숙하지?”
윤희의 물음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네 얼굴에 커다랗게 적혀 있어. 접근 금지. 가까이 다가오면 다칠 수 있음. 관심 사절. 오, 맙소사. 정말 그런 거야?”
“잘 모르는 사람에 대해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마.”
내 말을 들은 윤희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어떻게 잘 모르는 사람이야? 우리가? 두 번이나 만났고 오늘은 세 번째야. 게다가 밥까지 같이 먹고 있잖아.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다고. 알겠어?”
윤희는 나를 잔뜩 훈계한 뒤 어서 밥을 먹으라고 재촉했다. 도대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 윤희는 나를 어떻게 만난 것일까. 나는 궁금하기 짝이 없었으나 딱히 묻고 싶지는 않았다. 아마 내가 묻기도 전에 먼저 말할 것이 분명했다.
윤희가 장담한 대로 ‘쌍비’의 음식 맛은 훌륭했다. 나는 윤희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서둘러 먹기 시작했다.
내가 마지막 고기 한 점까지 입속으로 밀어 넣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또 만날 수 있지? 1997년 7월의 만남은 네가 꼭 기억해내야 해. 안 그러면 실망할 거야.”
“뭐?”
윤희의 말은 내 예상을 빗나갔다.
“이건 명령이나 부탁 따위가 아니야. 당연히 기억해야 할 만남이었다고. 계산은 내가 할게.”
윤희는 벗어둔 재킷을 다시 입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리둥절해진 내가 뭐라고 반박할 겨를도 없이 우리는 가게 앞에서 헤어졌다. 오후 수업이 없다는 윤희는 “안녕.”이라는 짧은 인사만 남긴 채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나는 학교로 터덜터덜 돌아오면서 윤희의 얼굴을 계속 떠올렸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1997년 여름 윤희를 만난 적이 있음을 기억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