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키키 리리 Oct 07. 2023

31.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있어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의사가 내게 물었다.


"마음이 현재에 있지 않고 늘 과거나 미래에 있어요."


나는 명절을 앞두고 느낀 스트레스를 그에게 말했다.


"해결하지 못한 과거의 순간이 불쑥불쑥 떠올라서 힘들어요. 시어머니가 저에게 야단치셨던 장면들이 머릿속에 재생될 때면 화를 주체할 수 없어서 온몸을 때리거나 머리를 쥐어뜯어요."


"일종의 자해인가요?"


"그런 셈이죠."


"혹시 벌을 받는다는 느낌이 드나요?"


"아뇨, 그렇지는 않아요. 그냥 화가 나요. 몸을 때리고 싶은 충동이 들어요."


"자해 말고 다른 방법을 찾으면..."


나는 그가 말을 잇기 전에 가로챘다. 심리상담을 받을 때 배운 방법을 말했다.


"알아요. 옆에 있는 쿠션을 때린다던지 신문지 같은 종이를 돌돌 말아서 때린다던지... 이런 방법을 알고 있지만 잘 안 돼요."


'하긴, 배운 대로 실천에 옮길 수 있으면 내가 여기 앉아 있을 리도 없지.' 


오늘따라 마음이 시니컬했다. 의지를 많이 했던 의사 선생님과의 대화는 초반부터 매끄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1, 2학년 중에 감당할 수 없는 학생들이 많아요. 폭력적이거나 수업 방해를 수시로 하거나 교사에게 욕을 퍼붓는 등의 행동을 일삼죠. 그런 학생들을 맡은 담임 선생님들의 얼굴이 나날이 말라가요. 옆에서 보고 있으면 안쓰러워요. 콩콩팥팥이라고 학생들의 부모 역시 똑같거든요. 우리 애는 집에선 멀쩡한데 학교에서 그런 걸 보니 선생들의 역량이 부족하다며 오히려 화를 내요. 담임 선생님들이 힘들다고 하소연을 할 때마다 내년에 내가 그 학생을 맡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커져요."


"과거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나요?"


"네. 물론 있었죠."


나는 그에게 트라우마로 남은 사건을 구구절절 설명했다. 


"과거에는 어떻게 했어요?"


"그냥 견뎠죠. 그 상황을 참고 견뎠어요. 다행히 올해는 운이 좋아요. 우리 반 학생들이 정말 착해요. 하지만 언제까지나 운에 기대서 살 순 없잖아요?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도망치고 싶어요."


나는 절망적으로 그에게 말했다.


"참는 일이 능사는 아니지요. 감당할 수 없으면 도망칠 수도 있고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까 그 일이 닥치면 그때 가서 생각해 봐요. 운이 좋으면 그런 학생들을 또 안 만날 수도 있어요."


오늘따라 의사의 조언이 전혀 마음에 닿질 않았다. 늘 운에 기대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인데 이 직업을 가진 이상 언제나 불안을 안고 살아야 한다. 




"제가 우울증이 아니라 조울증이 아닐까, 생각해요."


"왜 그런 생각을 했어요?"


"8~9월엔 운동을 엄청 열심히 했거든요. 점심 먹으면 20분씩 꼭 걷고, 집에 돌아오면 유튜브를 보면서 30분 동안 운동을 했지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열정적으로 말이에요. 여름엔 소설도 열심히 쓰고, 글쓰기에 열정을 쏟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운동도 시들하고, 글 쓰는 것도 심드렁해요."


그러자 의사는 내게 물었다.


"잠을 줄이면서 무언가를 한다던가 돈을 충동적으로, 혹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쓴 적이 있나요?"


"아뇨, 전혀요."


"잠은 어때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잠을 하루에 8시간씩 꼭꼭 자요. 다만 요즘엔 주말 낮잠을 오래 자긴 해요."


"고전적인 의미에서 조울증은 아닌데 워낙 우울증을 오래 앓다 보니까 주기가 있는 건 사실입니다. 지금은 좀 처지는 상태지요."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굴곡이 있으니 기분조절약을 좀 더 써볼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아빌리파이정은 체중증가에 대한 부담 때문에 꺼려했으니 리튬을 추가하는 방법도 있어요."


그는 리튬과 아빌리파이정에 대해 설명했으나 나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내 상태가 그의 설명을 유심히 듣기엔 좋지 않았다. 의사는 아빌리파이정을 증량하거나 리튬을 추가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나는 지금도 살이 많이 찐 상태라 더 이상 몸이 불어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럼 새로운 약을 먹어볼게요."


상담실은 나온 나는 뒷맛이 영 개운하지 않았다. 의사가 새로 처방해 준 약의 후기들을 살펴보니 리튬 역시 아빌리파이정처럼 살이 찐다는 후기가 보였다. 


무엇보다도 내가 조울증이 진짜 맞는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충동적으로 행동을 하기, 다른 사람과 시비 붙기, 잠을 안 자기, 과소비하기,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일을 벌이기. 이런 일을 전혀 하지 않는데 말이다. 


다만 내가 조울증이 아닐까, 생각한 이유는 평소보다 좀 더 활력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 활력적으로 움직였던 시기가 평소의 내 모습, 내가 잊고 살았던 모습, 내가 발견하지 못했던 모습이 아닐까 떠올려본다.  


나는 내 손바닥 위에 놓인 약봉지를 바라보았다. 리튬은 내가 먹는 다른 약보다 훨씬 크고 동그랬다. 이 조울증 약을 먹는게 맞을까? 약을 함부로 끊을 수 없는 것처럼 함부로 복용할 수도 없다. 물론 의사가 처방해준 약이긴 하지만 복용하는 건 신중하게 고려해야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