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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키 리리 Oct 31. 2023

불안에 잠식당하다

오늘 시험 감독을 들어갔다. 시험 종료령이 울리자 학생들이 걷어온 OMR답안지와 서.논술형 답안지를 교탁 앞에서 두 번이나 셌다. 교무실에 들어가 과학 선생님께 걷어온 답안지를 돌려주면서도 차마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응시 인원수에 맞춰 제대로 확인했을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결국 한 시간 뒤에 과학 선생님께 메시지를 보내 3학년 2반 답안지 매수가 모두 맞는지 확인을 부탁드렸다. 정확히 3분 뒤에 이상이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오후 3시 30분에 위기학생관리위원회에 들어갔다. 안건에 올라온 학생은 우울증으로 병원을 다니고 있는 상태였고, 십 년 넘도록 우울증과 함께 살고 있는 나로서는 해당 학생에게 감정이입이 많이 되어 그 자리가 몹시 괴로웠다. 가만히 앉아 위원들의 말을 듣고 있으니 "제가 우울증 환자입니다."라고 밝히고 싶은 충동이 쉴 새 없이 올라왔다. 위원들이 사후관리책으로 내놓은 방안들이 크게 와닿지 않았다. 우울증 환자에게는 이렇게 접근하면 더 좋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차마 말할 수 없었다.


퇴근길에 감자탕과 파전을 포장해 왔다. 일단 파전을 한 장 다 먹고 감자탕 한 그릇을 먹었다. 목구멍에서 음식물이 넘실거렸다. 속이 더부룩하고 명치가 아픈 것이 체기가 느껴졌다. 화장실로 달려가 먹은 것을 죄다 토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감자탕을 반 그릇 더 먹고 빈츠와 몽쉘을 먹었다. 먹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이렇게 먹다간 살이 더 찌겠다는 생각에 또다시 토했다. 폭식과 구토를 연거푸 반복했다.




이토록 커다란 불안을 느끼고 기분이 다운되며 식욕을 억제할 수 없었던 것은 모두 시험 탓이다. 내일은 내 과목 시험이 있는 날이다. 2교시 시험인데 아마 복도감독을 넣어놨겠지. 썰렁한 복도에 놓아둔 의자에 앉아 혹시라도 시험 문제에 오류가 있을까 봐 전전긍긍하며 심장을 졸이며 그 시간을 버텨야 한다. 그래서 시험 기간에 내 과목을 빨리 쳤으면 좋겠다. 이번에는 시험 둘째 날, 2교시라서 불안에 떨며 시간을 보내는 날이 더 길어졌다. 


문제는 앞으로 십수 년간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 년에 4번, 1학기 중간기말고사, 2학기 중간기말고사. 시험 출제도 스트레스지만 시험 문제에 오류가 발생할까 봐, 혹시라도 문제가 발생해서 재시험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겪을까 봐 걱정에 걱정이 꼬리를 문다. 불안이 엄청 커져서 나를 잡아먹을 지경이 되면 오늘처럼 기분이 쉽게 다운되거나 강박이 심해지거나 폭식과 구토를 반복한다.


나는 시험으로 인한 불안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잘 모르겠다. 제발 아무 일 없기를 간절히 바라며 시험 문제를 보고 또 보고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실수를 할 수도 있고 교차검토해도 발견하지 못하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나 혼자 수습할 수 있다면 괜찮지만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불안이 더욱 커진다. 




이 글을 쓰면서도 불안에 휩싸인다. 내 불안이, 걱정이 현실이 될까 봐 두렵다. 심장이 쪼그라들 것 같고, 머리와 눈이 무겁다. 누가 목을 쥐어잡고 흔드는 것처럼 숨쉬기가 괴롭다. 그러다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처럼 서글픈데 내가 우울증에다 불안장애 환자라는 사실이 새삼 느껴져서 그렇다. 


내가 모든 반에 빠짐없이 설명을 했던가? 시험 범위까지 모두 진도를 나갔던가? 이런 뻔한 의문들조차 답 없는 궁금증으로 다시 돌아올 때면 내가 마련한 진도표를 펼쳐보고는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불안이 커지면 강박이 따라오고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지금도 손만 뻗으면 내일 시험 볼 시험지 출력물이 곁에 있다. 자기 전에 한 번만 더 보고 자야겠다. 이제 그만 보고 싶어도 그만 둘 순간을 찾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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