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1.28 눈
탁 트인 수평선이 동해의 매력이라면, 크고 작은 섬들이 옹기종기 모인 게 남해의 매력이다. 여수의 바다 역시 그 섬들 덕분에 때론 가까운 바다가 큰 호수 같이 아늑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오전에 들린 브런치 카페에서 바라본 바다가 딱 그랬어. 추석 때 오면 앉을 테라스 자리도 마음속에 찜해두었단다.
그림 같은 풍경을 뒤로하고 이제는 떠나야 할 시간. 한가득 싸주신 음식을 차에 싣고, 건강하시라고 조심히 잘 올라가겠다는 이야길 하고서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왔다. 큰길로 나가려는데 전화가 오는구나. 못 준 게 있다고 다시 오라고. 차를 돌려 아파트 입구로 되돌아가는데, 엄마가 뛰어나오는 게 보였어.
"기름값 하라고 준다는 걸 깜빡했어."
"할머니 코 빨개."
바람이 차가워서 할머니 코끝이 빨개진 걸 보고 넌 배시시 웃으며 말했지. 넌 할머니 얼굴을 한 번 더 봐서 신이 났지만, 엄마는 눈물이 핑 돈다.
"엄마, 이것 때문에 뛰어왔어? 추운데 얼른 들어가. 고마워."
"그래 조심해서 올라가고, 우리 예쁜 원몬이 잘 가."
아쉬움을 안고 차를 몰아 떠나면서도, 할머니의 따뜻한 손길이 남긴 여운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어. 꾸덕한 마음을 안고 달리던 길, 창밖으로 하얀 눈송이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1시간도 채 달리지 않은 것 같은데 풍경이 달라졌어. 가볍게 흩날리던 눈송이는 구례를 지나자 함박눈으로 바뀌었다. 막히지 않는 때를 골라 출발했는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기는구나.
출발하고 3시간은 낮잠을 푹 자고, 또 1시간은 할머니가 챙겨주신 천혜향과 인절미를 먹으며 눈구경을 했다. 그리고 2시간 동안 네가 좋아하는 이야기들을 들려줬어. 가져온 책 보다 엄마 머릿속에 저장된 책이 훨씬 많으니까. 시작은 몽골 전래동화였지.
"못된 고양이 이야기 해줄까?"
"오-옴-"
"응, 맞아! 옛날에 스님이 오-옴- 기도를 하고 있는데, 못된 고양이가 스님 염주를 몰래 훔쳐가 버렸데~"
옆에서 듣던 아빠가 전부터 궁금했다며 "진짜로 몽골 스님은 그렇게 오-옴- 하고 기도해?"라고 묻네. 글세, 엄마도 몽골 스님 기도하는 거 안 봐서 잘 몰라. 그냥 너 재밌으라고 그렇게 하는 거야.
"위블리! 위블리 해줘."
"위블리~ 생일파티에 와줘서 고마워. 이건 내가 주는 선물이야."
"푸하, 그걸 어떻게 다 알아?"
시작과 동시에 웃음이 터진 건 네가 아닌 아빠였어. 네가 이야기해 달라고 할 때마다 엄마 입에서 책이 재생이 되는 게 신기하고 재밌었나 봐. 하루에도 같은 책을 7-8번씩 읽어달라고 한 네 덕분이다. 그 뒤로도 '엄마 없어져버렸어 추피', '수족관 추피' 등 각종 추피들 대잔치가 펼쳐졌단다.
멀미 때문에 계속 창문을 열고 닫기를 반복했어. 더디 가겠지만 휴게소에 들러 쉬기도 하고. 막판에는 더 할 게 없어 동요 모음을 틀고 율동을 하며 버텼다. 분명 지루하고 고된 시간이었어. 하지만 함께 알고 있는 이야기가 있다는 건 같이 부를 노래가 있다는 것만큼 힘이 되었다. 눈 속에서 엉금엉금 기어가는 답답한 시간도 이렇게 웃으며 보낼 수 있으니 말이야.
이렇게 우리 가족은 7시간 눈길을 뚫고 귀경길을 무사히 마쳤다. 오늘의 긴 시간도 우리에게 하나의 이야기로 남겠지. 더디 흘러가는 어느 날, 우리는 이 순간을 떠올리며 다시 웃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