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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김구난방

아몬드 크루아상

잠시 멈춰도 괜찮다는 위로

by 김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아이도 어른도 모두 힘든 것 같습니다. 등원 4주 차가 되었지만 아이는 울상이네요. 애써 웃으며 돌아섰지만, 온갖 걱정이 머릿속에 떠다닙니다. '낮잠은 잘까. 전화가 오려나. 집안일을 서둘러야겠네.' 하면서 말이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빵집 앞을 지나는데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퍼져옵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발걸음이 멈추네요. 홀린 듯 빵집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안녕하세요!"


문을 열자 익숙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갓 구운 빵이 가득한 진열장, 따뜻한 공기, 그리고 환한 얼굴로 맞아주는 사장님. 그런데 오늘은 뜻밖의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어쩜 이렇게 표정이 밝아요? 항상 보면 웃고 있어. 웃상이야. 기분이 좋아져."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습니다. 내가 웃고 있었다고? 사실, 몸살이 났는데. 발걸음 하나하나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했는데.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알 것 같습니다. 나도 모르게 밝게 인사한 이유를. 사장님이 언제나 밝고 기분 좋은 표정을 하고 계시기 때문이죠. 밝음은 전염되는 걸까요?


진열장에는 바삭한 크루아상, 쫄깃한 바게트, 고소한 깜빠뉴가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늘 사던 올리브 치즈 바게트를 하나 집는데, 지나가던 손님이 '아몬드 크루아상'이 있냐고 묻네요. 때마침 구워져 나온 터라 호기심에 덩달아 사봤습니다. 안 사던 빵을 사서 그런지, 사장님이 계산하며 말씀하세요.


"이거 맛있어요. 가서 우선 커피에 아몬드 크루아상부터 드세요. 해야 할 일만 하다 보면 끝이 없어. 좀 미뤄도 괜찮아요. 지금이 제일 힘들 때잖아."


'제일 힘들 때'라는 말이 가슴 한편에 훅 들어옵니다. 팽팽했던 긴장이 스르르 풀리며,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옵니다.


"맞아요. 끝이 없어요."


"아우, 그럼! 그러니까 쉬어요. 잠깐 있다 금방 올 텐데."


그 말에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을 밀어두어도 괜찮다고 느꼈습니다. 해야 할 일은 끝도 없고, 온종일 해도 다 못한 채 잠들겠죠?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따뜻한 커피 한 잔과 바삭한 크루아상일지도 모릅니다.


집으로 돌아와 커피를 내렸습니다. 햇살이 따스하게 드는 거실 식탁에 앉아 아몬드 크루아상을 한입 베어 물었습니다. '바사삭, 오도독.' 침샘을 자극하는 소리와 함께 겹겹이 쌓인 속이 부드럽게 무너집니다. 버터 향이 코끝을 스치고, 달콤한 아몬드 크림이 혀끝에 녹아듭니다. 진한 커피 한 모금을 머금자, 모든 걱정이 잠시 멈춘듯합니다. 그저 이 순간을 즐기기만 해도 괜찮다는 느낌.


늘 해야 할 일에 쫓기며 살지만, 모든 걸 다 해내야만 하는 건 아니겠지요. 아몬드 크루아상을 볼 때마다 사장님의 말을 떠올릴 것 같습니다. "지금이 제일 힘들 때잖아." 그래서 잠시 멈춰도 괜찮다고, 커피 한 잔과 빵 한 조각을 먼저 챙겨도 된다고요. 오늘 해야 할 일 목록에 '나를 위한 시간'도 하나쯤 넣어두는 것, 그게 지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 아닐까요?


커피를 다 마셨습니다. 햇빛은 여전히 환하게 거실을 비추며 온기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이제 어질러진 집을 치우기 시작합니다. 해야 할 일들은 여전히 식탁 옆에, 바닥 구석구석에 놓여 있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오늘 나에게 필요한 것을 먼저 챙겼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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