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2.04(화) 흐림
이곳은 한때 붉은 꽃밭이었다. 우리 집 안방과 거실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공터. 계절마다 색이 바뀌던 그곳. 네가 뱃속에서 8주쯤 지냈을 무렵은 5월이었고, 붉은 양귀비꽃이 가득 피어있었다.
나는 그 꽃밭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네게 속삭였지. 화창한 날의 햇살처럼, 포근히 산들거리는 바람처럼, 그 붉고 아름다운 꽃들처럼 엄마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고. ‘내년에는 우리 이 꽃밭을 함께 걷자.’ 그게 그날 나의 작은 소망이었다.
하지만 그 공터엔 학교가 들어서게 되었다. 꽃밭은 사라지고, 높은 벽이 세워지고, 땅이 파였다. 봄에는 양귀비꽃이, 가을엔 코스모스가 흐드러지던 그 자리에 크고 작은 중장비들이 모여들었다. 꽃밭이 사라진 게 아쉬웠지만, 그 생각은 네가 돌이 될 즈음 조금씩 달라졌다. 학교가 세워지기 시작하자, 넌 공사장에 푹 빠져 버렸거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포크레인 아저씨가 왔는지부터 확인하고, 산책길엔 매일 그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동물원에서도, 호숫가에서도, 고속도로에서도, 어디서든 포크레인 먼저 찾아내는 너였어. 엄마, 아빠, 함미, 하버지 다음으로 익힌 단어가 바로 그 '아저씨'였으니 말 다했지.
출근 도장만 따지면, 이 학교를 너와 내가 같이 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을 빼면 우린 매일 공사장 앞을 돌았고, 때론 차를 타고 빙 둘러 중장비 구경을 했어. 포크레인은 늘 너의 최애, 레미콘은 반가운 친구가 되었다. 트럭이 출차할 때 바퀴를 씻어내는 모습은 신기한 구경거리였지.
어느 날은 콘크리트 펌프카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했다. 길게 팔을 뻗고 구불구불 움직이는 거대한 모습에 반해, 아저씨가 퇴근할 때까지 그 자리에서 지켜보던 너를 나는 잊지 못한다.
"엄마, 콘크리트 펌프카 그림! 그림!"
나는 매일 엉성한 그림을 그리며 설명했지. "봐봐, 팔을 쫙 뻗어서 저기 옥상에다가 콸콸콸 부어주는 거야."
그러면 넌 꼭 덧붙였다. "엄마랑 원몬이랑도!"
그 옆에 꼭 빠지지 않고 우리 둘을 그려달라는 너를 보며 문득 생각했다. 이 학교는 꽃밭 대신 생긴 게 아니구나. 꽃밭에서 너를 기다리던 그 시간과, 학교를 지켜보며 자란 우리의 시간은 모두 내 삶의 한 장면으로 남겠구나.
이제 공사는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레미콘도, 펌프카도, 지게차도 떠났고 다시 포크레인이 찾아와 마지막 정리를 하고 있어. 울타리도 세워지고, 화단이 될 자리도 만들어지고 있다. 꽃들 대신 중장비 친구들을 만났지만, 그 모든 시간들이 겹쳐서 이 자리에 또 다른 추억이 피었다. 무엇이 있든 그곳을 특별하게 만드는 건, 너와 함께 한 시간이란 걸 배워가는 중이다.
언젠가 이 학교 운동장을 뛰어다닐 너를 상상해 본다. 그때도 기억할까? 꽃 대신 펌프카가 피어났던, 너의 첫 번째 공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