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2.05 날씨 맑음
해가 등을 슬며시 쓸어주는 늦은 오후였다. 간식을 먹으며 책을 읽어주다 보니, 주방 창으로 들어온 따스한 빛이 거실까지 늘어졌다.
이제는 저녁을 준비할 시간. 냄비에 물을 올리고 해물 육수 팩을 넣었다. 감자를 씻어 껍질을 벗기고, 남은 애호박과 함께 숭덩숭덩 썰어낼 즈음이었다.
"엄마, 이리 와보세요. 소리가 안 나요."
아이의 손에는 7개월 무렵부터 주구장창 보았던『호두까기 인형 사운드북』이 들려 있었다. 이젠 손때가 묻고 모서리가 닳은 그 책을 손에 쥐고, 제법 심각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손에 묻은 물기를 털고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아이는 상황을 설명하듯 책장을 넘기며 버튼을 눌러 보였다. 소리가 잠깐 나더니 지지직 흐려졌다.
"이런, 이런. 건전지가 다 끝나버렸나 봐. 아빠가 와서 고쳐줘야겠네."
"원몬이가!"
아빠가 소리가 멈춘 장난감을 고칠 때마다 옆에 꼭 붙어서 유심히 바라보던 아이였다. 마침내 나에게도 기회가 왔다는 듯, 말이 끝나자마자 벌떡 일어나 공구함을 꺼내러 달려갔다. 사운드 북이 침묵을 지키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나 보다.
벽장을 열고 꽤 무거운 공구함을 끙차낑차 꺼내더니 뚜껑을 열고 작은 드라이버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 사운드북 뒷면을 통통 두드리고, 나사를 돌리는 시늉을 했다. 본 건 있어서 따라 하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우습던지. 이 순간의 귀여움을 꼭 잡아 두고 싶어서 얼른 동영상 녹화 버튼을 눌렀다.
"원몬이가 고치는 거야?"
"응, 딜리보보로 이렇게 이렇게. 아빠처럼."
웃음이 터졌다가, 문득 마음이 뭉근해졌다. 세상 모든 걸 부모를 따라 배우는 이 작은 아이에게 내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과연 괜찮은 걸까 하는 질문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했던 사소한 말투, 작은 행동 하나가 오래 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엄마와 아빠의 작은 거울이다. 우리가 웃으면 함께 웃고, 우리가 미간을 찌푸리면 그 표정도 닮아간다. 그래서 아이를 바라볼수록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오늘 따라 한 건 공구질이었지만, 언젠가는 말과 태도, 삶의 방향까지도 닮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어릴 적, 내가 엄마에게 매일 들었던 말이 있다. "내 사람아, 우리 이쁜 사람아." 그 다정한 말을 이제는 내가 아이에게 매일 같이 건네고 있다. 그래서 나는 더 웃고, 더 다정하게 살아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나의 작은 거울 앞에서 다짐해본다. 이렇게 자랐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모습으로 내가 먼저 살아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