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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김구난방

여행

어디론가 가는 과정 그 자체

by 김이서

울란바토르 공항에서 이제 막 이륙했다. 한 점 그늘이 없는 초원이 발 아래다. 손금 같은 흙길도 끊어질 듯 이어지는 구릉도 이따금 혼자 솟아오른 석산도 이제 거대한 한 폭의 추상화가 되었다. 멍하니 창밖을 봤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구름처럼 따로 또 같이 흘러간다.


한여름 밤 꿈같은 시간이었다. 지평선에 노을이 질 때 다큐멘터리 ‘우리의 지구’를 직접 만난 기분이었다. 땅에서 달이 떠올랐다. 말이 풀을 뜯다 투레질하는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머리 위로 길게 뻗은 은하수보다 고개를 치켜들지 않고 별을 마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문명이 비켜 간 곳이 있음에 감사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착각이 들 때마다 눈앞에서 별똥별이 툭하고 떨어졌다. 어쩐지 도망에 가까웠던 여행이 완성되는 기분이었다.


정말 그랬던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사원의 108 계단을 올라 멍하니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볼 적에, 굵은 빗소리를 들으며 이 십년지기 친구와 별말 없이 보드카를 홀짝일 때, 6시간 동안 초원을 달리던 버스 안에서, 공용 샤워실이 널널해질 때까지 침대에서 뒹굴면서 여행의 이유를 발견했다. 이른 새벽 공항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왜 그렇게 못생기게 울었는지 그때야 알았다.


‘지긋지긋한 거 말고 지루한 게 필요했구나. 혼자 좀 따분하고 싶었구나.’


복직한 뒤 일상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구조조정을 거친 회사는 사옥도 구성원도 달라져 있었다. 나 역시 이전과 다른 팀에서 처음 맡는 포지션으로 새 동료와 함께 일해야 했다. 익숙지 않은 일터와 엄마가 처음인 나는 숨 고를 틈도 없이 필요에 내몰렸다. 휩쓸리기를 멈추고 떠난 3박 4일의 여행 동안 퍼즐이 맞춰진 것 같다. 여행 첫날 가이드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목적지에 있는 무언가를 보러 가는 게 아니라 어디론가 가는 과정 그 자체가 여행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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