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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김구난방

평생 독서하는 어른

독서가 쾌락이 되진 않았지만

by 김이서

“독서가 어떻게 습관이 돼요. 독서가 쾌락이 돼야 평생 독서하는 어른이 되죠.”


알쓸신잡에서 정재승 교수가 한 이야기다. 문득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내게 독서는 쾌락이 아닌 과제에 가까웠다. 아빠는 책 읽는 ‘좋은 습관’을 만들어주려 애쓰셨지만, 오히려 책과의 거리감만 키웠다.


퇴근 후 내게 오늘 몇 권을 읽었는지 무슨 내용인지 물으셨다. 매일 3권 정도 읽었으면 하셨는데, 그게 참 버거웠다. 나는 광물에 대한 책을 한 권 읽으면 뒷산으로 달려갔다. 책 속에 등장한 돌을 직접 찾기 위해서였다. 내가 찾은 돌에 보석이 박혀있는 것 같아 어떻게 빼낼지 궁리하기도 바빴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아빠에게 털어놓지는 못했다.


책을 다 읽은 척한 게 들통나 혼이 났던 날, 그렇게 빨리 못 읽는다고 했던 게 전부였다. 아빠가 책 읽는 버릇을 들이려 할수록 책과 멀어졌다. 독서 이외 다른 취미는 딴짓으로 여겨져서,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싶은 날에 스케치북을 숨기려고 책을 펼쳤다. 책은 코딱지만큼 읽었지만, 독서 중이라고 하면 걱정 없이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렇게 독서는 강요된 과제이자, 나만의 해방구가 되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독서를 많이 하는 어린이는 훌륭한 학생이다’라는 도그마가 생겼다. 책을 끼고 사는 친구를 동경해 그녀를 따라 독서논술반에도 들어갔지만, 내가 독서를 즐기지 않다는 사실만 확인했다. 어린 마음에 훌륭한 학생이 되고 싶었지만, 좀처럼 책이 좋아지지 않았다.


그러다 고등학생이 되어 공부가 싫어지자, 책은 제법 든든한 도피처가 되었다. 다들 좋은 대학 가려고 애쓸 때 도서관에 처박혀서 책을 읽곤 했다. 쓸데없이 다독하며 현실을 내팽겨 쳤는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했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는 책과 멀어졌다. 그러다 진짜 죽겠다 싶을 때만 진통제를 찾는 환자처럼 서점에 갔다. 그러니 내게 독서는 여전히 쾌락보다는 피난처에 가깝다.


아빠가 원했던 방식은 아니겠지만, 책은 내 삶에서 특별한 역할을 했다. 삶이 만족스럽지 않은 순간, 책 속으로 숨어들었다. 독서가 쾌락이 되진 않았지만, 인생은 늘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아서 평생 책과 함께하는 어른이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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