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하게 살았으니까 오는 거야
누가 더 힘들었나 겨루다 보면 꼭 큰 소리가 났다. 둘 중 하나가 없어져야 끝날 것 같은 소모전이 반복됐다. 남편은 내게 산후우울증인 것 같다고 병원을 가보라 했다. 병이 아니고서야 내 아내가 저럴 리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모든 불화를 결국 내 탓으로 돌리는 것 같아 또 화가 치밀었다. “우울증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지겨워, 전문의 소견받아다 줄게.”
퇴근 후 병원을 찾았다. 없던 병도 사라질 것 같은 아늑한 공간이었다. 내 차례가 되자 의사가 마중 나왔다. 뇌파 상태는 매우 좋고, 굳이 꼽자면 약간의 우울감이 있다고 했다. 의사로서 특별히 도와줄 게 없다며 병원을 찾은 이유를 물었다.
“출산 후 9개월 만에 복직했어요. 그 사이 70% 정도 희망퇴직을 했고 내 팀은 사라졌어요. 인사팀 전원이 퇴사 예정인 상태에서 배치돼 채용을 시작했죠. 상황은 나빴지만, 한 번쯤 해보고 싶던 일이라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의사의 놀란 얼굴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다 실무자 둘을 두고 팀장을 맡게 됐어요, 2차 구조조정을 진행하며 액받이 무녀 신세를 면치 못했죠. 아이 얼굴을 하루에 1시간도 못 봐요. 안팎으로 내 마음만큼 하는 일이 없어 늘 화가 나요.” 의사는 날 지긋이 바라보고 말했다.
“단기간에 너무 크고 많은 변화를 겪어서 번아웃이 오신 것 같아요.” 의사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내가 무리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 그냥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나 자신이 조금 안쓰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 자신을 위한 시간을 만들라는 조언은 실행하기 어려웠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결국 남은 육아휴직을 신청했다. 사실상 퇴사를 결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엄마는 "아깝지 않냐"라고 했다. 엄마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아쉬움이 섞여있었다. 곧 칠순인 엄마가 여수에서 올라와 아이를 봐준 데는 나를 위한 애틋한 마음이 있었다. 엄마 속을 모를 리 없지만, 어렵게 내린 결정에 물음표를 들이대는 일은 날 참 외롭게 만들었다.
며칠 뒤, 엄마에게 소식을 전해 들은 남동생이 전화를 해왔다. “지금까지 한 것도 오래 했어. 율원도 있는데 많이 버텼다.” 그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번아웃은 치열하게 산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은 마치 아주 크고 묵직한 문을 부드럽게 밀어내는 손길 같았다.
동생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용기가 생겼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애쓰지 않고 그냥 있어 보기로 했다. 이제는 조금 더 나를 아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