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 내려놔도 괜찮아

100-06. 내면 아이에게 말 걸기

by 최고미

"뭐든 척척 잘 해내잖아."

"믿고 맡길 수 있어. 항상 책임감 있게 하니까."

"넌 늘 하고싶은 일을 해내잖아."

"넌 항상 씩씩하고 밝아."

"예쁨 많이 받고 어려움 없이 자라서그런지 밝고 당차."

이런 말들을 줄곧 들어오며 살아왔다. 그 말들의 무게가 버거워진 것조차 모르고, 정말 나는 그런 사람이라 생각했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않는, 아니 사실은 외롭고 힘들고 서글픈데 그 티가 전혀 나지않는 캔디가 다른사람이 바라보는 내 모습이었다. 항상 밝고 씩씩하며 많은 일들을 척척 해내는 책임감있고 믿음직스러운 사람. 타인이 생각하는 내가 진짜 나인줄 알았다. 그 말의 무게에 진짜 내가 짓눌려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IMF때 아버지 사업이 망하고 비가 새고 쥐 갉아먹는 소리가 나는 집으로 셋방살이 들어갔을 때가 중학교 1학년이었다. 한참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 겪은 처지의 변화로 나는 가면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전혀 티내지 않고 학교 생활을 지내려 했지만, 마음 속에 숨겨둔 불안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려고 하면 짜증이 나곤 했다.

그러다 같은 반 아이와 다툼이 생겼다. 청소시간에 대충 하는 모습이 꼴보기 싫어서, 청소 안하고 뭐하냐고 나무랐다. 아마 짜증이 잔뜩 섞여 있었을 것이다. 그 말투가 기분이 나빴던지 그 아이가 내 어깨를 밀쳤고, 그렇게 몸싸움도 있었다. 다행인건지 빨리 상황이 수습되어 그리 다치지는 않았고, 방과후 교실에 남아 담임 선생님과 면담을 해야했다. 그 때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아이가 나에게 던진 한마디는 지금까지 내 가슴 속에 깊이 박혀있다.

"야! 너네집 부자잖아. 그거 믿고 그렇게 잘난체 하는거지?"

이 말에 서러움이 가득한 눈물을 쏟아냈다. 남의 사정도 모르면서 왜 저렇게 함부로 말하는지 괘씸했다가, 가세가 기울어진 내 상황을 친구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에 안도와 불안의 양가적 감정에 머리가 복잡했다. 그 때 차라리 속사정을 털어놨어야 했는데, 오히려 더 철저히 연기했다. 쓸데없는 자존심인 줄 알면서도 불쌍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리플리 신드롬'이라는 말이 있다. 현실세계의 문제나 좌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짓된 자아를 만들어내고, 이를 실제라고 믿으며 행동하는 심리적 장애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고, 나중에는 그것이 진짜 나라고 믿어버리고 만다. 내 거짓자아로 진짜 자아는 내면 깊숙한 어두운 곳으로 숨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거짓자아가 진짜라고 믿으며 살아가는 시간들이 쌓일수록 삶은 여유가 없고 힘겹게 느껴졌다. 집안에 어려움 없이 잘 지내는 것처럼 해야했기에, 아르바이트도 그저 사회생활을 배우기 위한 경험 정도인 것처럼 포장했다. 생활비도 벌어야했고, 공부도 해야했고, 연애도 취미생활도, 사회교류도 어느 하나 놓칠 수 없었다. 구김없는 삶을 연기할수록 더 완벽하게 보이는데 집중했다. 동시에 감정을 완벽하게 숨기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진짜 감정을 외면하고 해맑고 밝은 것으로 대체하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어느새 진짜 내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되었다.

무대 뒤는 가장 어둡지만 진짜 나를 마주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가면극을 한 판 벌인 후 6평짜리 원룸 내 방에 들어오면, 화려하게 치장했던 가면을 벗고 진짜 나를 바라보면서 연기하며 가빠진 숨을 내쉬었다. 그 때 엄마가 늘 하던 말이 떠올랐다. 굳이 남들에게 힘든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없다고 했다. 엄마도 어딜가면 아직도 부잣집 사모님 소리를 듣고, 형편이 어려워 허덕이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를 듣는다고 자랑 비슷하게 얘기했다. 돈은 많이 없어졌고 생활이 어려워도 생글생글 웃고 다니면 남들이 초라하게 보지 않는 것 같다는 말도 했다. 엄마의 말들을 떠올리며 거울 속 나를 바라보며 거짓웃음을 가득 지어보였다. 가슴 속 깊은 곳에 묵직하고 답답한 기운을 느끼면서, 진짜 나를 마주하는 공간에서조차 거짓자아를 진짜인냥 드러내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 믿었다.

결국 탈이 났다. 어느날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깊고 음침한 어둠이 나를 삼켰다.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텔레비전 채널만 돌려댔다. 설거지와 빨래가 쌓여가는데 치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떤 날은 하루종일 잠만 자고, 또 어떤 날은 밤새도록 잠이 안와 온 방을 뒤집어 엎어 가구를 새로 배치하기도 했다. 그런 내 모습을 처음으로 지인에게 탄로났다. 친한 언니였는데, 조심스레 속마음이라도 털어놓으니 좋더라며 정신과 상담을 권했다. 그냥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지금 생각해보니 살고 싶었던 것 같다. 우울증 진단을 받았고, 상담 일정을 잡았다.

오래전부터 이 무거운 가면을 벗고 싶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우울증 진단이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것 같은 가면의 모습만 보고 밝고 구김없이 해맑은, 그래서 우울증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 가면 뒤 저 멀리 너무 어두워서 보이지도 않는 진짜 '나'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오래전 그곳에서 다시 자신을 꺼내오라고 두드리고 있다는 것을.

꺼낼 용기가 없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떻게 내면 속 깊은 곳에서 그 아이를 꺼내와야할 지 몰랐다. 방법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눈물을 쏟아내는 일이 많았다. 그 눈물은 짙은 어둠을 연하게 만들어줬다. 그러자 조금씩 조금씩 어둠 속에 숨어있던 아이가 희미하게 그리고 점점 더 또렷하게 나타났다. 그러자 그 아이는 내게 말을 걸었다. 드디어 용기를 내줘서 고맙다고 했다. 가면이 답답하고 무겁지 않았냐고 안타까운 목소리로 다정하게 물었다. 쌩얼이 훨씬 예쁘다고 칭찬도 했다.

그 아이의 말에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가면이 너무 무거웠다고 답했다. 사실 가면을 벗으면 나를 불쌍하게 바라볼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웠다고, 그런데 그 가면이 내 가슴을 짓눌러 지금 너무 아프다고 했다. 편하게 잠을 자고 싶다고도 했다. 남의 생각에 더 이상 나를 재단하지 않고, 팔다리 쭉쭉 뻗어 당당하게 다니고 싶다고 했다.

내 말에 내면아이는 말했다. 지금도 잘 살아왔지만, 앞으로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그러니 그 무거운 가면을 이제 내려놔도 괜찮다고. 사실 남들은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관심없다고. 사람들은 각자의 문제들로 충분히 머리 아파서 다른 사람들을 둘러볼 오지랖이 그리 많지 않다고. 그러니 자기를 봐달라고. 자기를 매일 10분씩만 사랑스럽게 봐주면 점점 더 밝은 곳에 서 있을거라고.

그 이후로 아무리 바빠도 하루 10분 그 아이에게 사랑 가득한 눈맞춤을 하고 있다. 참 신기하다. 내면아이가 약속한대로 매일 사랑스럽게 봐주기만 했는데, 어두운 곳에서 나와 서 있다. 다시 어둠 속에 들어가 두번 다시 찾을 수 없을까봐 하루 10분은 꼭 아이를 만나는데 최선을 다한다. 그 10분이 다시 나를 움직이게 했다. 10분 동안 아이는 계속 나에게 알려준다. 나를 사랑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라고.

#책과강연 #백백프로젝트

작가의 이전글엄마 아빠는 태양, 나는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