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것의 생생함과 숙성의 농익음
바다음식을 좋아하세요?
“어떤 종류의 음식을 좋아하세요?” 소개팅이나 선을 볼 때처럼 처음 보거나 아직 안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에게 물어볼법한 질문입니다. 선뜻 뭐라고 대답하기 애매할 수 있는데, “한식, 중식, 양식, 일식 중에서 골라보세요”라고 질문을 이어 가면 고민이 더욱 깊어집니다. 분명 한국사람이기 때문에 한식이 가장 좋은 것은 분명한데.. 특별한 날에는 고기를 써는 양식도 먹고 싶고, 간단하게 배달 음식을 먹고 싶을 때에는 짜장면 한 그릇도 생각나고, 반주가 생각날 때에는 초밥 한상에 어묵탕도 좋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는 매우 간단한 질문인데 저의 생각이 깊어질수록 답하기 어려워집니다.
뒤의 질문을 조금 바꾸어 보겠습니다. “육지 고기와 바다 고기 중에서 어떤 거를 좋아하세요?” 이 질문에는 아까 보다 쉽게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육지 고기를 더욱 선호하는 사람입니다. 딱히 고기와 생선 중에 가리는 음식이 있지는 않지만 둘 중에 하나를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주어지면 열에 여덟, 아홉은 육류를 선택하는 것을 보니 제 입맛의 취향은 육지에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땅에서 나는 고기의 음식 향과 맛을 바다에서 나는 생선의 그것보다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바다에서 나는 재료들 중에 생선이 재료가 되는 음식(회, 구이, 조림, 탕 등)들의 경우 그나마 즐기는 편이나 그 외의 바다 친구들과는 도통 친해지질 못했습니다. 특히 멍게, 해삼, 개불 등 흔히 횟집에서 곁들이찬류로 제공되는 음식들은 강하게 불호하는 편입니다. 특유의 비린내와 뭉클 거리는 식감에 친숙해지려 노력했지만 40년을 살아오며 내린 결론은 ‘나는 애내랑 글렀어’입니다.
그래도 바다고기가 생각나는 날들이 꼭 있습니다. ‘회에 소주 한잔하고 싶은 날’은 ‘삼겹살에 소주를 한잔 걸치고 싶은 날’과 우열을 가리기 힘든 술 한잔 당기는 순간입니다. 날생선 특유의 식감과 쫄깃함에 생선의 단맛. 거기에 소주 한잔을 곁들이면 그 자체가 서민 최고의 페어링이 됩니다.
그 맛이 좋아 대학교 학창 시절에는 회를 먹을 기회를 시시 탐탐 노리기도 했습니다. 등에는 커다란 가방을 메고 있지만 주머니는 가볍고 지갑은 빈약하던 시절. 자금 사정에 여유가 없는 학생들에게 회는 쉽게 구경하기 어려운 음식이었습니다. 그나마 친구들이 군대를 가거나 군대에서 휴가를 나오면 주머니 두둑한 군인들 따라 가락시장이나 노량진 시장에 가서 회 한 접시를 사 먹던 기억이 납니다. 예전의 수산 시장에서는 1층에서 회를 썰면 2층 다락방 같은 곳에 올라가서 자리를 잡고 먹거나, 혹은 가게 앞 평상 같은 곳에서 바로 잡은 회를 먹는 상호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가게 안에는 비린내가 가득했고 노후화되어 열악한 시설이었지만, 그때 그 장소만이 가지고 있는 낭만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회 한점 집어 먹고 소주한 넘기던 그 맛은 그때의 분위기와 함께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납니다.
활어회보다는 숙성회
생선회는 갓 잡아서 아직 생생한 고기를 회로 떠서 바로 먹는 게 최고로 생생한 횟감이라 여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닷가에 놀러 가면 더욱 회세를 찾는 경향이 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저 바다, 저 안에서 방금 잡아 올린 생선이 바로 내 식탁 위로 올라오는 듯한 느낌 때문에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회 한 접시 해야지?”라고 말을 합니다. 물론 바다를 바라보며 먹는 운치가 생선의 맛을 배로 올려주는 느낌도 없지 않습니다. 그런 부분들이 합해져서 우리는 바다로 놀러 갈 때마다 회 한 접시를 반드시 챙기고는 합니다.
이토록 갓 잡은 ‘활어’를 최고로 여기는 것과 반대로 잘 ‘숙성된 회’를 더욱 좋은 회사로 여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초밥 음식 문화가 유명한 일본의 경우 활어회를 먹기보다 숙성회를 먹는 문화가 더욱 발달해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일본여행을 가서 초밥 요리의 명성에 가득 기대하며 처음 초밥을 먹는 한국인들이 생각보다 쫄깃하지 않아 실망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한국에서도 숙성회를 취급하는 곳이 많아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숙성횟집은 쉽게 찾기 어려운 식당이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동네마다 쉽게 찾을 수 있는 음식점은 아닙니다.)
저 역시도 처음 숙성회를 먹었을 때에는 그전까지 먹어오던 회와는 다른 이질적인 식감과 맛에 어색함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곧 숙성회 특유의 부드러운 식감과 은은하게 올라오는 향, 그리고 숙성된 재료에서 나오는 감칠맛에 매료되었습니다. 한번 그 맛을 알게 된 이후부터는 활어회보다 숙성회를 더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숙성회를 즐겨 먹다 보니 어느덧 생생한 식감의 활어회가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활어회가 탱탱한 식감과 신선함을 자랑한다고 한다면 숙성회는 특유의 꼬들함과 깊이 있는 맛이 일품입니다.
숙성회는 회를 더욱 오래 먹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하루 내지 이틀에서 길게는 며칠을 식초와 향신료 등으로 숙성시키면 일반 회에 비해 보관하여 먹을 수 있는 기간도 늘어나게 됩니다. 식초 등에 절여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기타 미생물이나 기생충 등이 제거되어 안전한 음식이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어서 일까요. 날음식의 탱탱한 식감이 점점 부담스러워지고 숙성회의 부드러운 목 넘김을 더욱 편안하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몇 번의 위경련을 겪은 이후부터는 더욱 생 날것의 음식은 부담스러워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몸에서 거부를 하는 것인지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지레 짐잣 피하는 것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어쨌든 저는 날 음식을 조금씩 멀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날 것의 느낌이 나는 사람, 숙성된 감성의 사람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도 활어회와 숙성회를 바라보는 저의 감정과 같아지는 것 같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제 어린 시절은 팔팔 뛰는 날 것의 활어회의 모습이었습니다. 젊고, 패기 있고, 활기가 넘쳤지만 동시에 언행과 사고가 가다듬어지지 않았고, 거칠고, 자만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어느덧 저도 이제 나이 불혹을 넘어 중년의 나이로 가는 문턱에 서있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40여 년을 살아오면서 생겨난 이런저런 일들과, 10년을 훌쩍 넘기는 사회생활 속에서 겪은 경험들을 통해 자연스레 반강제적으로 인생의 숙성 기를 거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 가야 할 길은 한참 남았습니다.)
문득 주변을 돌아보니 회사 내에서는 중간 이상의 위치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조금씩 회사에 윗사람들보다 아래 친구들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후배 직장인들과 커뮤니케이션하고 함께 일을 해나가야 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어린 후배들 역시 제가 그 나이 때 그랬던 것처럼 한참 싱싱한 활어회 같습니다. 싱싱하고 탱크럽게 사회에 자극을 주는 존재. 사람은 아무래도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만났을 때 편안함을 느낀다고 이제 꼰대가 되어버린 저도 저와 유사하게 숙성되어 가는 사람이 편안하게 느껴집니다.
불편함이 싫어 사회 초년생들을 멀리 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요즘 MZ세대들은 우리와는 너무나도 다르다는 많은 글들과 그런 사례들을 웃기게 만든 동영상 콘텐츠를 보다 보면 선뜻 다가서면 안 될 것 같은 무서움까지 생겨납니다. 그들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이런저런 지도와 훈계의 노력을 할수록 나에 대한 감사함 대신 불평과 불만의 화살이 향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있습니다.
내가 가자고 하는 방향성과 그들의 사회생활을 바라보는 가치관은 다를 수 있으니까요. 사회 보편적 타당성, 합리성보다는 개인의 개성과 자유를 중시하는 세상의 흐름 속에서는 타인에 대하여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하기가 불편해집니다. 그렇게 저는 서로가 원하는 대로 서로에게서 조금 멀리 떨어져 거리를 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거리두기’는 사회생활에 편안함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실수를 해도 어차피 내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하면 일편 마음이 편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실수가 벌어져도 그건 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무한경쟁 시대에서 알아서 살아가는 거지 뭐. 이 한마디로 마법같이 모든 다른 행위들을 덮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가 이 조직과 사회에서 가지는 의미란 무엇인가? 내게 조직/사회는 어떠한 역할을 가지길 희망하는가? 등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과 회의가 들게 됩니다. 내가 맡은 바 위치에서 정해진 내 일을 충실하게 수행하고자 하는 소명의식과, 돈을 받고 일하는 입장에서 떳떳하게 맡은 일은 다하고자 하는 책임감. 이 둘의 무게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만들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지나가는 길 위에 버려진 쓰레기가 있습니다. 아무도 주울 생각도 하지 않고, 그 누구도 그 쓰레기 때문에 불편해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걸 주워야 하는 게 아닌지 계속 신경 쓰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루 종일 고민을 합니다. 또한 한편으로 아무도 저 쓰레기 때문에 불편해하지 않는데 나 혼자 왜 이러지? 혹은 저게 쓰레기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고민을 할 시간에 단순히 그 쓰레기를 줍기로 했습니다. 줍고 나서 그게 쓰레기가 아니면 다시 고민하면 될 문제입니다.
이제는 사회 속에서의 제 역할과 포지션에 대한 시선을 다르게 바라봅니다. 날것의 그들을 숙성해 나가는 것이 제 사회적 역할입니다. 서로가 원하던 바라지 않던 그들과 함께 이 사회에서 숙성되어 살아가는 것이 내가 해야 할 내 사회적 소명과 내 역할이라 믿습니다. 그 역할이 가르침을 주어야 할 어른들을 잃어 가는 지금 사회에서, 사회적 질서와 인간적 배려의 기준이 점점 옅어져 가는 지금 사회에서, 제가 지키고자 하는 길입니다. 법을 지키는 선에서는 모두가 각자 원하는 대로 살아도 되는 사회입니다. 그 기조에 맞게 저도 저만의 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살겠습니다.
하지만 그 기준 속에서 우리가 함께였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가고자 하는 길이 꼭 정답이 아니더라도 나와 우리가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가도록 논의하고 새로운 방법을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날것의 느낌에서 조금은 숙성되어 과정에서 우리가 함께 발맞춰 성장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