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머금은 미역국
과거는 생일, 현재는 슬픔, 미래는 행복
끓이기 쉬운 미역국
“고미가 끓여준 미역국 맛있는데, 요즘에는 왜 미역국 안 끓여줘?”
문득 와이프가 미역국을 끓여달라며 말을 건넵니다. 미역국. 오래 끓일수록 깊은 맛이 우려 나기에 만드는 데 시간이 제법 걸리지만 그다지 어렵지는 않은 요리입니다. 알았다며, 조만간 한번 끓여 주겠다고 하고 말을 돌려 봅니다. 분명 지금 오늘 만들어 달라고 꺼내본 말일 텐데 미역국 먹고 싶지 않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와이프는 더 이상 미역국 얘기를 이어가지 않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미역국은 만들기 어려운 음식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세우기 조금 민망하지만 제 미역국의 맛은 수준급입니다. 조미료를 조금도 쓰지 않아도 맛있는 미역국을 곧잘 만들어 내곤 합니다.
그 비결은 아주 간단합니다. 들어가는 재료를 아끼지 않기 때문인데요. 최고급 한우 양지나 사태로 국을 내거나, 굴을 한가득 넣어서 국물을 우려내면 맛이 없기가 어렵습니다. 거기에 간장과 액젓으로 간을 내고 마늘로 향과 맛을 더해주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미역국이 만들어집니다.
미역국은 오래 끓일수록 그 맛의 깊이가 더해집니다. 기본 1시간 정도는 끓여줘야 그 맛이 제대로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혹 먹다가 남은 미역국이 있으면 잘 보관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다음날 다시금 끓이면 오히려 맛이 더 좋아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잔불에 오래 끓인 음식들이 몸을 데우는데 효과가 좋다고 하던데 미역국이 바로 그런 음식입니다. 몸에 더운 기운을 더해주어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이제는 유튜브를 통해 레시피를 찾아보거나 하지 않아도 뚝딱 금방 만들어내는 음식이지만, 사실 얼마 전까지 한 번도 시도해 보적 없는 요리였습니다. 최근에 부쩍 많이 만들게 되면서 급속도록 실력이 붙은 요리인데요. 요리를 시작한 계기는 썩 유쾌한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얼어붙던 날
“안타 깝게도 9주에서 성장이 멈췄습니다…”
검사를 서둘러 마치고 나오는 주치의의 얼굴에서 사람으로서 느끼는 당혹감과 의사로서 업무 진행을 위한 차가움을 동시에 볼 수 있었습니다.
뒤이어 검사실에서 나오는 어리둥절해하는 와이프의 표정을 보며 이미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희망으로 다가왔던 작은 생명체는, 미처 사람의 형태를 모두 갖추지 못한 채 삶의 불길을 더 이상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 모든 수치가 정상적이라고 걱정 말고 맘 편히 있으던 의사 선생님의 말씀 때문이었을까요. 안 좋은 결과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아이가 있는 삶에 대한 청사진을 그려보던 우리로써는 바로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냥 너무나도 당황스러웠습니다.
산모에게 좋지 않으니 바로 후속 조치를 위한 수술을 받자는 의사의 말을 뒤로하고 나중에 하겠다며 서둘러 검사실에서 빠져나왔습니다.
몇 가지 검사를 더 하고 추후 일정을 잡기 위해서 병원에 남아있던 잠깐의 시간이 너무도 길게 느껴졌습니다. 주위에 배가 부른 임산부 들과 태아 사진을 보며 행복한 웃음을 띠고 있는 젊은 부부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더욱 아파왔습니다. 슬픔 속에 한번 삐뚤어진 마음으로 들여다본 세상은 그 아픔의 크기만큼 어두움을 선사했습니다. ‘남의 행복에 아픔을 느끼다니 정말 최악이다’라고 읊조리며 빨리 와이프를 데리고 나갈 생각뿐이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아픈데 와이프는 어떨까 빨리 이곳에서 나가자.
빨리 이곳에서 나가자. 그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서둘러 도망을 치듯이 병원에서 나왔습니다.
삶은 어쨌든 흘러가야 한다
저희는 사실 혼전 임신으로 급하게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급작스럽게 생긴 일이었지만 둘 다 나이가 결혼 혼기를 이미 훌쩍 넘긴 상황이었기에 자연스럽게 현 상황을 받아들였습니다. 아이가 생겼으니 잘됐고, 우리가 결혼을 하게 되었으니 오히려 잘 되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날도 예정된 결혼 준비 스케줄이 많았습니다. 집 계약을 하고, 혼수 용품을 사러 가고.. 무엇보다 웨딩드레스를 셀렉하는 날이었습니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예비신부는 계속해서 울고 또 울고 있었습니다. 저는 가만히 묵묵히 운전을 하고 있었지만 당연히 마음이 너무 아픈 상황이었습니다. 커다란 응어리가 갑자기 가슴에 내려앉는 듯한 기분. 그 응어리를 애써 외면하며 말을 건넸습니다. “괜찮아,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괜찮아, 누구의 잘못이 아니야”라는 위로의 말들을 건네다 오히려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했습니다.
남자답게 위로를 하고 싶었지만 위로는커녕 오히려 더 서럽게 울고 말았습니다. 한번 터져 버린 눈물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결국 입장이 바뀌어 오히려 저를 위로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울어, 마음 아프고 속상하게” 라면서 위로의 말들을 거 내다 그냥 둘 다 실컷 울어 버렸습니다.
사람이라고 정의 내리지 못한 친구가, 죽음보다 소멸에 가깝게 아주 작게 사라졌는데도, 밀려오는 슬픔의 크기는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그 난리 속에서도 우리는 웨딩드레스 투어 진행을 위해 약속 장소로 갔습니다. 아니, 진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급하게 결혼 준비 하면서 어렵고 어렵게 욱여넣은 스케줄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웨딩드레스를 보겠다고 하는 우리도 참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럼 뭐 어떡할 건가. 슬프다고 결혼까지 포기해 버릴 것이냐.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삶은 어쨌든 흘러가야 했습니다. 앞으로의 모든 행복을 내려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너무나도 예쁜 웨딩드레스 속에서 그녀는 어설픈 웃음을 보이곤 했습니다. 하지만 얼굴에 드리어진 그늘을 모두 숨길 수는 없었습니다.
하얀 웨딩드레스와 어두워진 그녀의 얼굴.
그걸 보는 제 마음도 더욱 메어졌습니다.
그날의 모든 기억이 선명합니다. 너무 힘들었지만 아주 잘 버텨냈던 하루로.
정성스럽게 끓이던 미역국
바로 다음날 어렵사리 병원을 찾아 수술을 받았습니다. 다행히도 큰 수술은 아니었고 바로 퇴원하여 집에 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저는 매일같이 미역국을 끓여 주었습니다. 다른 의미로 출산과 비슷해서 미역국이 몸에 좋다고 병원에서 알려 주었습니다. 그렇게 처음으로 끓여보기 시작한 미역국을 매일 같이 하다 보니 금세 실력이 늘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하루도 거르지 않고 미역국을 먹다 보니 질리지 않도록 소고기, 굴, 캔참치 등의 재료를 돌아가며 다양하게 시도해 보았습니다. 넣는 재료에 따라 팔색조처럼 다양한 맛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늘어나는 미역국 요리 실력에 따라 미역국도 점점 맛있어졌습니다.
다행히도 그녀는 제가 끓인 미역국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하루 삼시세끼 미역국을 먹으면서도 큰 불평이 없었습니다. 아니 한동안 아주 즐겨 먹었습니다.
그녀가 즐겨 먹으니 요리하는 입장에서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까지 더해 더욱 열심히 요리했습니다. 미역국을 오래 끓이듯이 오래도록.
다시 행복의 요리가 되기를
이전까지 미역국의 이미지는 탄생을 축하해 주는 요리였습니다. 주로 생일에 많이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역국의 맛을 크게 좋아하지 않았어도 즐거움을 상징하는 요리이기에 항상 반가운 음식이었습니다.
자주 요리하다 보니 미역국에 친숙하게 정이 들었습니다. 내가 자주 하는 요리, 내가 잘 만드는 요리.
미역국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미역국의 이미지는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최근의 슬픔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경험이 이전의 아픔에 덧그려져 지길 기대합니다. 우리가 이루고자 했던 꿈이 다시 우리에게 찾아와 못다 이룬 행복을 완성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다시금 미역국이 행복의 요리가 되는 날을 기다립니다.
그날이 오면 저는 행복에 겨워 춤을 추며 미역국을 다시 끓일 겁니다. 마음이 아팠던 그날처럼 눈물이 흐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날의 눈물에는 웃는 한 가정의 모습이 비쳐 있기를 간절히 기원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