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48. 입덧 바이러스 개발 기획서

임산부는 의외로 화가 많다.

by 곰민정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임산부 배지에 그려진 온화하고 포근한 표정의 여성이 내가 생각해 온 임산부에 대한 이미지였다. 곧 맞이할 아이를 상상하며 귀엽고 앙증맞은 신발과 옷을 사 모으며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아 온 세상이 모두 아름답게 보이는 그런 사람을 상상했던 것 같다.


어처구니없게도, 임산부인 나는 정확히 그와 반대의 모습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격한 입덧을 겪은 탓에 몇 주간 뺑뺑이 30바퀴 탄 상태로 김과자만 겨우 주워 먹었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했던가. 그런 격한 나의 신체 상태에 끝판왕으로 예민한 정신이 깃들게 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여기저기 임신, 출산, 육아에 대해 함부로 말을 얹는 자들을 겪으며 점점 차오른 나의 분노는 '입덧 바이러스 개발 계획'으로 이어졌다. 처음으로 각종 히어로물에 나오는 빌런들의 속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우선 화학과를 나온 우리 이모를 섭외하기로 했다. (이모 동의 x)




그리고 왠지 모르지만 지도에 나오지 않는 알래스카 지하 벙커에서 입덧 바이러스 - 1알만 먹으면 먹덧, 토덧, 양치덧 등등 입덧이란 입덧은 다 경험할 수 있는 - 를 개발한다. (아마 007 영화 같은 데서 봤던 것 같다.) 당시에는 데스노트처럼 이 알약을 먹일 사람, 알약을 먹게 된 근거, 몇 정 먹일 건지를 쓰는 것이 나의 유일한 화풀이(?)였다. 뭐 당사자들은 전혀 모르겠지만, 나는 마음이 조금 풀렸다.


15개월이 흐른 지금 노트를 보니 너무 귀엽다.

그때는 정말 처절하게 복수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육아하느라 정신이 없어 바이러스 개발이고 나발이고 잠이나 한 시간 더 잤으면 좋겠다 싶긴 하지만, 그래도 이 작은 기록 덕분에 힘겨웠던 그 시절을 웃어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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