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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멘트 Jul 29. 2023

영국이 사랑한 브랜드 브릿팝

브릿팝은 장르인가 문화적 현상인가?

영국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는 브릿팝을 ‘90년대 영국 록밴드의 운동(movement)’이라고 정의한다. 당시 록밴드를 중심으로 사회 전체가 어떠한 목적을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인 현상이 있었다는 것이다. 브릿팝을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예술의 한 갈래가 아닌, 특정 시기에 존재했던 영국 고유의 문화적 현상으로 서술하려는 의도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김재중의 정규 2집 [녹스(NO.X)]처럼 브릿팝을 레퍼런스로 한 앨범들은 ‘브릿팝 장르’라는 표현을 적지 않게 사용하고 있으며, 언론에서는 콜드플레이, 뉴 호프 클럽처럼 영국 출신 밴드들을 ‘브릿팝 밴드’로 통칭하기도 한다. 브릿팝의 의미는 이처럼 선명한 듯하면서도 모호하다.


매거진의 표지를 장식한 브릿팝

브릿팝의 의미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우선 브릿팝의 탄생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브릿팝은 영국 음악의 자존심을 되찾겠다는 목적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80년대 후반 펑크록에 댄스 사운드를 결합하며 영국 음악의 흐름을 주도했던 매드체스터씬은, 90년대에 들어서 정부의 보수적인 사회정책(Thatcherism)과 더불어 여러 사건들이 겹치면서 그 열기가 점차 감소하고 있었다. 반면 미국에서는 너바나가 정규 2집 [Nevermind]를 발매하면서 그런지 록을 전 세계에 퍼트리고 있었다. 이미 브리티시 인베이전으로 영광의 시대를 살아본 영국으로서는 가만두고 볼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었다. 때문에 그런지 록에 반감을 느낀 스웨이드와 미국 투어에서 실패를 경험한 블러는 각각 정규 1집 [Suede]와 정규 2집 [Modern Life Is Rubbish]에 영국적인 정서를 가득 채우며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선택을 했다. 영국에는 영국만의 음악이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대중들의 관심을 안으로 가져오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언론들은 일제히 이들에게 브릿팝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오아시스의 공식 데뷔 ‘Supersonic’

브릿팝을 상징하는 아티스트는 오아시스다. 이들에게서 브릿팝의 음악적 특징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오아시스는 정규 1집 [Definitely Maybe]부터 매드체스터의 향기를 풍기며 등장했다. ‘Supersonic’, ‘Live Forever’, ‘Rock N Roll Star’처럼 펑크록 특유의 거친 창법, 단순하면서도 중독적인 진행, 디스토션을 입힌 기타 사운드가 두드러진 트랙들은 대중들에게 영국적인 정서가 무엇인지 인식시키기 충분했다. 이후 정규 2집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에서는 비틀즈의 소프트 록에 기반한 작법을 선보였다. ‘Wonderwall’, ‘Don’t Look Back In Anger’, ‘Champagne Supernova’처럼 전작에 비해 어쿠스틱과 오케스트라 사운드의 비중을 높이며 모던 록을 지향한 트랙들은 대중성을 완벽하게 공략했고 브릿팝을 절정으로 이끌었다. 이처럼 오아시스와 브릿팝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두 앨범은, 서정적인 멜로디와 고전적인 사운드를 효과적으로 활용해 영국적인 정서를 극대화하면서 영국 음악 자체의 위상을 높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엄연히 기존의 음악적 요소들을 바탕으로 아티스트의 정체성을 강화한 것이지 장르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


영국의 두 번째 국가라고도 불리는 ‘Wonderwall’

다시 말해 브릿팝은 서정적인 멜로디와 고전적인 사운드를 활용하여 대중성을 지향한 음악이다. 대중들을 공략하기 위해 다양한 음악적 요소들을 결합했다는 것은 장르 음악과 대조되는 팝 음악의 존재 의미로 귀결된다. 브릿팝이 뚜렷한 색채를 가지고 있음에도 독자적인 장르라고 말하기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이다. 브릿팝을 대표했던 아티스트들도 자신들의 음악을 ‘브릿팝 장르’로 정의하지 않았다. 오아시스의 리더 노엘 갤러거는 "우린 브릿팝 밴드가 아니라 유니버셜 록을 한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 자체로 음악성을 설명하기에 브릿팝이라는 단어는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당시 영국의 최대 이벤트였던 브릿팝 전쟁

브릿팝이 문화적 현상으로 정의된 원인은 서사에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브릿팝이라는 단어는 영국 언론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영국적인 정서를 담은 음악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자국 유망주들의 체급을 의도적으로 키워서 너바나와 미국이 주도하고 있던 세계 음악의 흐름을 가져오기 위한 것이었다. 영국 언론이 선택한 대표 선수는 오아시스와 블러였다. 북부 맨체스터 출신 노동 계층이었던 오아시스와 남부 런던 출신 중산 계층이었던 블러는 라이벌리를 만들기 완벽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언론이 기다리는 것은 방아쇠를 당기기 위한 명분이었다. 1995 브릿 어워즈에서 싱글 [Parklife]로 오아시스의 정규 1집 [Definitely Maybe]를 누르고 4관왕을 차지한 블러는 “이 상을 오아시스와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는 소감을 남겼다. 이후 오아시스와 블러는 각각 싱글 [Roll With It]과 싱글 [Country House]를 같은 날 발매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언론은 ‘브릿팝 전쟁’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라이벌리의 판을 크게 키우기 시작했고 진보적인 정치적 구호(Cool Britania)와 어울리며 사회 전체를 움직일 만큼의 문화적 현상이 되었다. 1996년 영국 넵워스 파크에서 열린 오아시스의 공연에 당시 영국 인구의 5%가 예매를 시도했던 사건은 당시 브릿팝의 영향력을 체감하게 해 주었다. 마침내 브릿팝 전쟁은 크고 작은 대결 끝에 오아시스가 정규 2집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로 판정승을 거두며 마무리되었다. 돌아보면 브릿팝 전쟁이라는 대결 구도 덕분에 브릿팝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영국의 음악 산업을 키우기 위한 서사적 기능으로 작용했던 것이었다.


1996년 오아시스 넵워스 공연 당시 인파

정리하자면 브릿팝은 영국 음악의 자존심을 되찾겠다는 목적을 바탕으로 스웨이드와 블러가 음악을 만들면서 탄생했다. 이후 오아시스와 블러의 브릿팝 전쟁이라는 서사가 대중들을 끌어당기면서 브릿팝은 사회 전체를 움직일 만큼의 문화적 현상이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하나의 ‘브랜드’가 성장하는 과정과 매우 유사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애플은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는 슬로건을 바탕으로 아이폰을 개발했다. 이후 스마트폰 분야에서 삼성의 갤럭시와 라이벌리를 형성해 혁신 경쟁을 계속하면서 현재는 세계 최고의 기업이 되었다. 이처럼 브릿팝과 애플은 모두 가치를 전달하기 위해 탄생하여 그것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품이나 서비스가 만들어지고, 프로모션 과정에서 잠재 고객들의 관심을 사로잡을 만한 서사가 더해져 고객들이 높은 신뢰도를 가지고 구매할 수 있는 브랜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애플이라는 브랜드를 믿고 아이폰을 구매하는 것처럼, 브릿팝이라는 브랜드를 믿고 음악을 소비했던 것이었다.

오아시스의 정규 3집 [Be Here Now]가 영국 대중들에게 차디찬 혹평을 받고 이로 인해 문화적 현상의 열기가 식으면서 브릿팝은 브랜드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대중들은 더 이상 브릿팝이 전달하는 가치에 공감하지 않았으며, 브릿팝이라는 브랜드를 믿고 음악을 소비하지 않았다. 블러의 프런트맨 데이먼 알반이 남긴 “브릿팝은 죽었다”라는 발언은 브랜드의 폐업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오늘날 브릿팝 음악을 만들거나 브릿팝 밴드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애플이 만들지 않은 스마트폰은 아이폰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by Ja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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