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Trap 장르의 도래
지난 7월 28일 발매된 Travis Scott의 4집 [UTOPIA]는 발매 직후 국내외를 막론하고 각종 힙합 커뮤니티에서 뜨거운 화젯거리 중 하나였다. 단순히 탑 급이라고 하기도 부족할 만큼 절정을 달리고 있는 Scott의 인지도를 생각한다면 어찌 봤을 때 당연하기도 하겠지만, 앨범의 사운드도 그 화제성의 이유였을 것이다. [UTOPIA]는 불후의 히트곡 ‘SICKO MODE’를 비롯해 ‘goosebumps’, 혹은 ‘HIGHEST IN THE MOON’ 같은, 기존 대중들에게 익숙했던 Scott의 정통 트랩 (Trap) 넘버들과 비교해서 확연히 결이 다른 앨범이었다. 앨범의 1번 트랙 ‘HYAENA’는 그 ‘결이 다름’을 초장부터 선언하는 듯한 곡이었으며, 이러한 바이브는 ‘MODERN JAM’, ‘CIRCUS MAXIMUS’이라거나 ‘LOOOVE’ 같은 트랙에서도 이어진다. 많은 매니아와 평론가들은 이 지점에서 Kanye West의 [Yeezus] 앨범을 소환해 각자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고 말이다. (실제로 본 앨범에는 Kanye와 [Yeezus]의 프로듀서 Mike Dean이 (따로이긴 하지만) 참여하기도 했다.) 비단 [Yeezus]가 아니어도 [UTOPIA]는 Scott의 음악에서 들을 수 없던 각종 새로운 사운드로 가득하다. ‘MY EYES’는 프로듀서부터 완벽하게 [BLONDE]를 오마쥬 했으며 ‘DELRESTO’는 작년 힙합 씬에 잠깐 불었던 하우스 (House) 열풍 (Beyonce의 [Renaissance]라거나, Drake의 [Honestly, Nevermind]와 같은…)을 의식한 듯하다. ‘LOST FOREVER’에서는 드럼리스 (Drumless) 장르를 대표하는 플레이어 The Alchemist와 Westside Gunn의 지원 사격 아래 해당 장르의 사운드를 기존 Scott의 스타일과 훌륭하게 융합해 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런 변화가 대중들에게 마냥 쉽게 와닿은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나마 친숙한 모양새와 작법을 갖추고 있는 ‘MELTDOWN’과 ‘FE!N’이 발매 직후 빌보드 Hot 100에서 각각 3등과 5등으로 진입했지만 Morgan Wallen에 밀려 1등을 달성하지 못했으며, 지금은 떨어진 12위와 24위를 기록하고 있기에 Scott 입장에선 여러모로 아쉬운 성적표로 남게 됐다. 스포티파이 스트리밍에서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고는 하지만 결국 훗날 더 큰 가치를 지닐 훈장은 빌보드일 것이 당연하기에 더더욱 그렇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을 거둘 점이라면 앨범 단위의 차트 빌보드 200에서는 1위를 차지했다는 점이다. 이 빌보드 1위라는 성적은 “놀랍게도” 6월 30일 발매된 Lil Uzi Vert의 [Pink Tape]를 제외한다면 2023년 유일하게 1위를 차지한 힙합 앨범이다. 자못 믿기지 않는다. 2023년의 3분의 2가 지나가고 있는 지금, [Pink Tape]와 [UTOPIA] 외에는 1위가 없다니! 심지어 곡 단위 차트인 빌보드 100에서는 아직까지도 힙합이 존재하지 않는다. 올 하반기에 예정된 A$AP Rocky의 신보가 대박을 쳐주지 않는 한, 2023년은 어쩌면 힙합 탄생 50주년이라는 기념비적인 해가 아닌 힙합이라는 장르의 (천천하고 완만한) 내리막길이 시작되고 있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해가 될지도 모른다. 그 어떤 장르보다 핫하고 대중 친화적인 장르가 힙합 아니었던가? 힙합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본 글에서는 2010년대 중반 이후 메인스트림 힙합을 지배하고 있는 장르인 트랩을 중심으로 그 원인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가장 먼저 손에 꼽히는 이유라면 역시 씬을 이끌어 줘야 할 중견급 아티스트의 부재일 것이다. 그 시절 차트를 석권했던 많은 트랩 래퍼의 대다수가 저마다의 (혹은 비슷한) 이유로 지금은 예전 같지 않은 것이 현 실정이다. Migos 멤버들을 비롯해 Da Baby, Kodak Black, Young Boy Never Broke 혹은 6ix9ine과 Megan Thee Stallion, Tory Lanez 등 많은 트랩 래퍼들이 조금씩 차트 파워를 잃어 가고 있으며, Rae Sremmurd나 Lil Dicky, Lil Pump 혹은 Fetty Wap과 같은 사람들은 모두의 기억 속에서 철저히 잊혀가고 있는 중이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힙합의 조류, 대안이 되어줄 줄 알았던 이모 힙합 (Emo Hiphop) 장르의 젊고 유망한 래퍼들 대부분은 불미스러운 일로 세상을 떠나버렸다. Juice WRLD, XXXTENTACION, Lil Peep과 같은 래퍼들이 그 예이다. 드릴 (Drill)을 대중화시킨 Pop Smoke나 Migos의 Takeoff도 세상을 떠났다. 조금 더 시야를 위로 올려본다면 역대 최고의 래퍼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닐 Kanye West는 속된 말로 ‘맛이 간' 상태이다. 더 속상한 것은 지금 언급된 래퍼들 중 꽤 많은 일부는 결국 본인들의 언행이 빌미를 제공한, ‘자업자득’에 가까운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빌보드에서도 지적했듯이 “미국의 다른 어떤 음악 장르들도 힙합처럼 총기, 마약 혹은 경찰과 별다른 관계를 맺지 않는다.” 이 특징은 다른 장르에 비해 힙합만이 가지는 매력이었음과 동시에 (결과론일 수도 있지만) 불특정 대중에게 거부감을 가지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할 것이다. Drake, Future와 같은 초 거물 래퍼들이 작년에 냈다는 이유로 올해를 안식년처럼 여기는 것은 자기 합리화에 불가하다. 올해 역시 Jack Harlow나 Young Thug, Trippie Redd, Gunna와 같은 거물들이 컴백을 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Travis Scott과 Lil Uzi Vert는 Drake와 Future 못지않은 초 거물이다. 심지어 Jack Harlow와 Gunna는 2022년에도 활동을 했었고, 그때는 1위를 달성했던 래퍼들이다.
차트 성적과 대중성을 떠나, 2010년대 중후반의 트랩은 퀄리티까지 뛰어난 명반들이 즐비했다. Future의 [DS2] (2015), Lil Uzi Vert의 [Luv Is Rage 2] (2017), 21 Savage의 [I Am > I Was] (2018), Migos의 [Culture] (2017)라거나 Young Thug의 [Jeffery] (2016) (혹은 취향껏 [So Much Fun])과 같은 앨범들은 그 시대의 메이저 힙합 – 트랩의 골든 에라를 상징하는 앨범일 것이다. 그에 반해 지금 발매되는 앨범은 대부분이 아쉬움을 남긴다. Drake만 하더라도 [Scorpion]과 이후 [Certified Lover Boy]와 [Honestly, Nevermind] 같은 앨범들은 각종 평론가와 매니아들에게 신랄한 혹평을 들어야만 했으며 다른 트랩 래퍼들의 이후 신보들도 전성기 시절의 본인 앨범들과 늘 비교되곤 한다. 트랩 장르가 품고 있는 고질적 문제 – 자가복제라는 딜레마를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특히나 컨셉추얼함을 베이스로 극한의 단순함과 중독성을 추구하는 소위 ‘멍청트랩’ 장르가 떠오르며 이 딜레마는 더더욱 심화됐으며, 그 후 인기를 끈 드릴 역시 비슷한 딜레마를 공유하고 있다. 여기에 TikTok 열풍까지 불어오니 더더욱 대중성과 음악성이 분리되고 있는 것이 현 실정이다. 혹자는 "평론가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성적과는 무관하다"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평론가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은 결국 머지않아 곧 대중에게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은근히 잦았다. ‘그 담론이 언제쯤 도달하는가’ 하는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대중들도 듣는 귀가 있다. 트랩의 가장 궁극적인 안티 테제에 가까울 컨트리 (Country) 장르가 새롭게 급부상하는 것도 이 현상의 방증이라면 비약일까? (물론 컨트리의 대표 주자 Morgan Wallen만 하더라도 (당연하겠지만) 힙합과 완전히 유리된 음악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트랩 래퍼를 비롯한 많은 의식 있는 래퍼들이 이 상황을 마냥 손 놓고 지켜만 보는 것은 아니다. 당장 앞에서 소개한 Travis Scott의 [UTOPIA] 역시 인더스트리얼 (Industrial)을 비롯한 다양한 사운드를 도입하며 기존의 Scott의 문법, 그리고 트랩의 문법에서 탈피하려는 시도가 돋보인 앨범이다. 이 앨범에서 ‘MELTDOWN’과 같은 대중에게 친숙한 트랙은 극히 드물다. 마찬가지로 1위를 차지한 Lil Uzi Vert의 [Pink Tape]도 같은 부류이다. ‘Flooded The Face’나 ‘Endless Fashion’같은 익숙한 트랩 넘버가 다수이긴 하지만 그 속에서도 메탈코어 (Metalcore) 밴드 Bring Me The Horizon과 함께 한 ‘Werewolf’라거나 일본의 메탈 아이돌(!!!) 그룹 BABYMETAL이 참여한 ‘The End’와 같은 몇몇 트랙들은 트랩과 메탈을 합친 곡이 아닌가. 언뜻 90~00년대의 뉴 메탈 (Nu Metal) 장르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음악적 주도권이 메탈이 아닌 힙합에 있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저지 클럽 (Jersey Club) 장르를 메이저로 끌어올린 Just Wanna Rock도 빼놓을 수 없다. 이렇듯 [Pink Tape]는 여러 아쉬움을 안고 있는 앨범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메탈을 포함한 다른 장르들과의 융합을 제시했다는 측면에서는 분명히 시대적 의의를 내포하고 있는 앨범으로 남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1 NIGHT’, ‘Peek a Boo’와 같은 곡으로 멍청트랩의 대표로 자리매김한 Lil Yachty는 올해 1월 네오 싸이키델리아 (Neo-Psychedelia) 장르의 앨범 [Let’s Start Here]를 발매했다. 해당 장르의 대명사 격인 밴드 Tame Impala와 전설적인 밴드 Pink Floyd의 영향을 잔뜩 받았음이 느껴지는 앨범이다. 그렇다고 ‘IVE OFFICIALLY LOST ViSiON!!!!’와 ‘The Alchemist.’와 같은 트랙에선 단순히 오마쥬와 레퍼런스의 영역에만 그치는 것이 아닌, 래퍼만이 가지고 있는 야마까지 보여주는데 성공하며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수작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러한 장르를 확장하고자 하는 시도는 그 외에도 넉넉히 찾아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Drake의 [Honestly, Nevermind]는 (퀄리티를 떠나) 하우스 장르를 힙합과 R&B에 끌고 온 앨범이었으며, 영국의 Slowthai는 올해 포스트 펑크 (Post Punk) 장르를 도입한 앨범 [UGLY]를 발매하기도 했다. 현재 가장 핫한 래퍼 중 하나인 Playboi Carti와 그의 사단 ‘Opium’은 레이지 (Rage)라는 새로운 물결의 선두주자이다. 지금 든 예시는 모두 메이저 씬에서의 예시일 뿐, 언더그라운드로 눈을 넓힌다면 그 새 조류는 더더욱 많다. 드럼리스 힙합은 서서히 대중들에게도 인식되고 있으며, JPEGMAFIA와 Injury Reserve로 대표되는 익스페리멘탈 힙합(Experimental Hiphop)도 점차 반응을 얻고 있다. (올해 3월 JPEGMAFIA와 Danny Brown의 합작 앨범 [Scaring the Hoes]는 JPEGMAFIA로 하여금 처음으로 빌보드 200에서 100위권 내로 들게 해준 의미 있는 앨범이다) ‘자가복제’라는 딜레마를 안고 있는 드릴 장르에서도 샘플링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Bronx 드릴 (a.k.a Sample 드릴)이 새롭게 떠오르며 신선함을 주기 위해 노력 중이다.
지금 힙합 씬을 지켜보고 분석할 때마다 나는 묘하게 1970년대 영국의 펑크 (Punk) 씬이 오버랩되고는 한다. 사실 골똘히 생각해 보면 트랩과 펑크는 어딘가 닮은 구석이 많은 장르들이다. 1) 펑크는 당시 영국 경제 상황과 맞물려 기존 프로그레시브 락 (Progressive Rock)과 하드락 (Hard Rock)에 대한 반발로 큰 인기를 얻은 장르로, 2) 개러지 락 (Garage Rock)에서 영향을 받아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모토와 함께 그 어떤 장르보다 쉽고 단순함을 특징으로 하는 장르였다. Sex Pistols의 프론트맨 Johnny Rotten의 ‘I Hate Pink Floyd’는 펑크를 대표하는 프레이즈일 것이다. 3) 이 장르는 훗날 여러 측면에서 발생한 문제점을 이유로 몰락하며 결국 포스트 펑크, 뉴 웨이브 (New Wave)와 같은 다양한 장르들의 뿌리적인 역할로만 남게 된다.
이 흐름을 메이저 씬 힙합과 트랩으로 대입해 본다면 1) (프로그레시브 락과 같은) 기존 Kanye West로 대표되는, 실험성을 강조한 힙합 혹은 (하드락과 같이) Eminem을 비롯해 지나치게 랩 퍼포먼스를 강조하는 힙합 대신 2) 쉽고 단순하고 누구나 리듬 타기 좋은, 그리고 더티 사우스 (Dirty South) 장르에서 영향을 받은 트랩이 큰 인기를 얻게 됐고 그 특징은 멍청트랩과 드릴로까지 이어진다. 3) 그리고 펑크가 저물었듯 이제는 트랩이 저물고 있고, 지금은 레이지를 비롯해 새로운 장르로의 변화를, 그리고 다른 장르와의 융합을 시도하고 있는 과도기인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의 [Pink Tape], [UTOPIA]와 같은 앨범들은 당장 하나의 장르로 묶기는 어렵지만 어쩌면 ‘Post-트랩’의 흐름을 여는 격의 앨범일 수도 있겠다.
때문에 나는 지금 상업성의 부진을 이유로 힙합 씬 전체의 위기로까지 확대시키는 것은 기우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미 힙합과 대중음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이르렀다. 당장 올해 빌보드 200에서 총 10주간 1위를 차지한 SZA의 [SOS]만 하더라도 트랩을 비롯한 힙합적 요소들이 강하게 녹아든 앨범이었다. 상술한 컨트리 씬의 Morgan Wallen도 'Broadway Girls'나 'You Proof'같은 같은 곡을 내기도 했고 말이다. 예전만큼 차트를 독식하는 것은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또 트랩 장르의 유행은 끝날 수도 있겠지만 힙합은 계속해서 메이저 장르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트랩에서 Post-트랩으로 향하는 과정 속에서 ‘진짜 음악을 잘하는 트랩 래퍼’가 누구인지도 가려질 것이다. 펑크의 대명사 밴드 Sex Pistols를 탈퇴하고 Public Image Ltd를 결성해 포스트 펑크 장르에서도 족적을 남긴 Johnny Rotten처럼, [The Clash]와 [London Calling]을 연이어 발매한 The Clash처럼.
By 베실베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