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GLOW, NCT, 프롬, Ashnikko 외
율 : 청량과 하이틴, 청춘의 물결이 일고 있는 케이팝 씬에서 걸 크러쉬, 걸스 파워 콘셉트를 고수하고 있는 보기 드문 그룹이다. 에버글로우는 데뷔 초부터 크러쉬한 이미지를 고수했는데, 해적 (미니 3집 – ‘Pirate’), 무사 (싱글 3집 – ‘First’), 블랙위도우 (미니 2집 – ‘LA DI DA’) 등 컨셉추얼하고 다크한 무드를 다수 거쳐온 바 있다. 이번에도 그 분위기를 이어가려는 듯 타이틀 곡 ‘SLAY’에서는 캐주얼한 밀리터리룩에 'Break the rules'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가져간다. 이는 세상이 정의한 틀에 의해 위축된 소녀들에게 그 규칙을 깨자는 메시지로 진취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상을 그려내는 서사를 가지고 있다. 이런 장엄한 서사에 맞춘 듯 강렬한 킥과 스네어 드럼, 반복적으로 외치는 캐치프레이즈, 그리고 에버글로우에게 빠질 수 없는 파워풀한 퍼포먼스는 보이는 그대로 당차고 시원했다.
걸그룹의 약점으로 잘 꼽히는 랩 또한 위화감 없이 잘 소화해 내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두 번째 코러스 이후 등장하는 브릿지의 보컬이 더 날카롭고 힘 있는 느낌으로 연출됐다면 어떨까 싶다. 강한 멜로디와 랩핑으로 2분가량 잡아둔 무게감이 가성과 여린 보컬로 인해 다소 힘이 빠지는 경향이 있다. 클라이맥스로 향하는 길목에서 힘을 빼버리니 더 허전한 느낌이랄까.
이 점을 제외하고는 근래에 보인 걸그룹 씬에서 가장 신선한 모습이었다. 이런 걸 크러쉬 콘셉트와 파워풀한 퍼포먼스 덕분인지 1억 뷰 이상인 MV가 네 곡으로 늘어났다. 해외에서는 꽤나 반응이 오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국내에서는 성장세가 주춤하는 것 같아 더 강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할 것 같다. 국내 케이팝 판에 다시 걸스 파워의 바람이 불길 함께 기다려보겠다. 뚝심 있게 지키고 있는 에버글로우만의 정체성이 빛을 발하는 날이 오길.
배게비누 : 1년 8개월 만에 거대 그룹 NCT가 정규 4집 [Golden Age – The 4th Album]을 발매했다. 타이틀곡이자 단체곡인 ‘Golden Age’를 선공개했는데 개인적으론 앨범에 대한 기대치를 반감시키는 곡이었다. 보컬 파트와 랩 파트의 분위기가 너무나 극명하게 나뉘고 특히 인트로가 끝나고 랩 파트로 이어지는 연결이 굉장히 부자연스럽게 들린다. 20명의 멤버가 4분이 안 되는 곡의 파트를 나눠가지고, 랩과 보컬이 모두 있는 것이 NCT 단체곡의 필수 조건임을 알고 있지만 이런 극단적인 반전을 가져가는 구성이 최선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반면에 보컬 파트의 흐름은 아까울 정도로 좋았다. 인용한 베토벤의 비창 2악장과 후렴의 멜로디가 잘 어울리고 다시 비창으로 돌아와 마무리되는 흐름이 재밌었다. '펼쳐질 Golden Age'에 대한 벅찬 감정이 절로 느껴지는 섬세한 편곡이었다.
또 다른 타이틀 ‘Baggy Jeans’가 이 앨범의 체면을 살리지 않았나 싶다. 올해 SM Ent.에서 나온 타이틀곡 중에 기대치를 충족시켜 준 곡이 몇 되지 않았는데 오래간만에 SM의 폼을 보여주는 곡이었다. 묵직한 베이스와 신스가 중심이 되는 굉장히 미니멀한 구성인데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좋다는 인상이다. 지루할 틈 없이 포인트들이 많은 곡이다. 리드미컬하고 쫄깃한 랩을 시작으로 NCT 다운 평범하지 않은 훅과 NCT 하면 빠질 수 없는 독특한 소스로 채운 브릿지, 아웃트로에선 로우키의 보컬이 베이스와 겹쳐 들리고 그 위에 화음을 쌓는다. 언뜻 들으면 심플하지만 세련돼서 'NCT 별거 안 해도 멋있다!'는 생각이 들도록 신경을 많이 썼다는 게 느껴진다. 옷 고르는 데 하루 종일 걸려놓고 아침에 대충 입고 나와도 힙한 꾸안꾸st 힙스터 같은 곡이랄까.
수록곡 중엔 ‘PADO’와 ‘The Bat’가 인상적이었다. 재지한 트랙 ‘PADO’는 청량하면서도 힘 있는 해찬의 보컬이 정말 매력적이었고 ‘The BAT’는 메탈릭한 사운드로 박쥐, 배트카라는 테마를 잘 풀어냈다. 도플갱어, 배트카, Alley Oop, 캥거루 등 가사 테마도 흔치 않은 소재인 게 역시 NCT 답다 싶었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곡 자체의 재미는 떨어졌다. 매번 들어가던 유닛곡도 없고 발매 직전 인천에서 열린 단체 콘서트가 급박하게 진행됐던 점 그리고 이쯤 예정되어 있던 NCT DREAM의 리패키지 앨범 발매가 어그러지는 등 일정에 맞춰 정신없이 나온 감이 없지 않아 있고 그래서 아쉬운 점도 있지만 올해는 엎어지지 않고 단체 앨범이 무사 발매된 것에 만족하는 바이다.
미온 : 장황하게 건네는 토닥임보다는 담백한 한 마디가 더 큰 위로가 되곤 한다. 이를테면 "내가 지금 너의 곁에 있어"와 같은 말들. 프롬의 음악이 그러한데, 이번 싱글에서는 "슬픈 그대가 좋아"라는 한 마디를 통해 흠처럼 여겨지는 슬픔의 감정을 긍정적으로 승화시켰다. 이러한 메시지는 드러내선 안 될 것 같은 모습마저도 애틋하게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전해주는데, 그 지점 하나만으로도 이 곡이 설명된다.
프롬은 주로 밤과 달, 그리고 계절 속에서 흐르는 마음들을 노래했다. '당신의 계절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건네던 그녀는 이번 싱글을 통해 다시금 그 물음을 던지면서도, 슬픔의 계절에 머물고 있는 이들에게 자신의 슬픔을 끌어안아야만 다음 계절로 향할 수 있다고 말해준다. 이러한 메시지는 밴드 실리카겔의 멤버이자 놀이도감인 김춘추의 편곡을 통해 보다 풍부하게 표현되었는데, 김춘추 특유의 따뜻하면서도 넘실거리는 사운드가 더해지면서 내면을 깊숙이 파고드는 곡이 완성되었다.
앨범 소개글에 의하면, 곡의 제목은 그녀가 언젠가 선물 받았던 꽃말이라고 한다. 결국 이 곡은 그녀의 이름 'Fromm'처럼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를 '너와 나의' 이야기로 확장시킨 곡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기에 연대의 메시지를 담고 있기도 하다. 슬픔은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같은 계절을 겪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 때문에 이 노래도 분명 여러 사람의 마음에 남게 되지 않을까.
배게비누 : 음악부터 비주얼, 뮤직비디오까지 뭐 하나 평범한 게 없는 Ashnikko가 범상치 않은 데뷔 앨범 [WEEDKILLER]를 공개했다.
5곡의 뮤직비디오를 통해 그녀가 굉장히 그로테스크한 비주얼을 추구한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Ashnikko는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린 광신도들에게 화형 당하기도 하고, 로봇인지 괴수인지 알 수 없는 크리처와 싸우는 전사가 되기도 하며 온몸을 잿빛으로 칠하고 점액질의 알에서 나오기도 한다. 그녀의 음악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 하이퍼 팝을 베이스로 '매드 맥스' 같은 디스토피아가 절로 떠오르는 온갖 왜곡된 소리들과 샤우팅, 분노와 경고로 가득한 잔인하고 선정적인 가사까지 정말 범상치 않다.
이 자극적인 앨범이 매력적인 이유는 두 가지이다. 모든 곡이 단순하고 반복적인 구성과 캐치한 킬링 파트를 갖고 있으며 대부분 3분 이내로 질릴 새도 없이 끝나버린다. 무엇보다 그녀의 분노는 아무 의미 없는 감정 표출이 아니다. ‘World Eater’에서는 기득권층을 비판하고, ‘Cheerleader’에서는 완벽을 요구하는 미의 기준을 다루며, ‘Miss Nectarine’에서는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Ashnikko만의 기괴한 세상은 시각과 청각으로 현실세계를 향한 불만을 자유롭게 표현한다. 이곳은 여기에 공감하는 사람들에게 통쾌하고 재밌는 경험이 되어줄 것이다.
율 : ‘Maniac’으로 국내에서 유명세를 얻은 후 내한 공연까지 섭렵한 코난 그레이의 새 싱글이 발매되었다. 피아노 선율에 얹어지는 감미로운 보컬과 섬세한 감정선은 단숨에 곡에 몰입하게 만든다. 잔잔하게 전개되는 발라드는 프리 코러스까지 이어지며 꽤 긴 텐션을 유지하며 잔잔한 흐름을 가져간다. 그러나 후렴에 진입하는 순간 등장하는 기타와 드럼 사운드, 보컬에 맞춰 찍히는 킥은 어떠한 거창한 장치나 효과 없이도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게다가 프리 코러스까지 쌓아온 감정을 한 번에 터트리는 속 시원한 후렴은 쉬운 가사와 보컬에 덧입히는 더블링으로 캐치함까지 가져간다. 이런 식의 극적인 전개와 귀에 박히는 후렴구, 우울한 가사에 상반되는 곡 분위기로 지루할 틈 없게 만드는 솜씨는 영락없는 메이드 바이 코난 그레이다.
한편, 가사와 함께 듣는 것 또한 코난 그레이의 음악을 맛있게 감상하게 하는 포인트 중 하나다. 그는 자신의 아픔과 상처를 음악으로 승화시켜 내어 듣는 이 또한 그 감정에 몰입시키고 같이 치유받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가사가 아티스트 개인의 경험, 혹은 생각과 감정을 녹인 이야기라 할지라도 ‘Comfort crowd’의 삶의 공허함, 연인에게서 오는 상처를 담은 ‘Fight or flight’, 밀레니얼 세대의 우울을 담은 ‘Generation’ 등을 듣다 보면 비단 코난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비참하게 만들고 떠난 이에게 '날 버린 네가 승자'라 냉소적으로 말하는 이번 곡에서도 어느 순간이면 기억 속 누군가를 끄집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3개월 전에 낸 싱글 ‘Never Ending song’에서 80년대 바이브의 레트로 사운드로 꾸며낸 뉴웨이브를 보여주었고, 같이 공개한 리릭비디오 역시 4:3 비율의 가라오케식 편집 영상이라 다음 앨범에서 레트로한 무드를 가져가려나 싶었다. 이번 싱글은 본래 하던 식의 인디 팝이었으나 공식 리릭비디오는 ‘Never Ending song’과 같은 식의 영상인 것을 보면 이 싱글들이 다음 앨범의 예고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아티스트라 새로운 변신도 기대감으로 다가온다. 고심해 고른 새 옷이 그에게 새 영광을 안겨주길 바라본다.
미온 : 오마르 아폴로의 음악은 서정적인 알앤비 장르를 골조로 가져가지만, 그 안에서 다양한 장르적 요소들을 추가하거나 그만의 독특한 작법이 녹아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번 싱글에서는 미니멀한 구성 속에서도 그의 센스를 엿볼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사운드를 채울 곳과 덜어내야 할 곳을 적절하게 조절한 부분이 돋보인다. 프리코러스와 브릿지 파트에서 그 특징이 두드러지는데, 프리코러스에서는 보컬과 사운드를 동시에 줄이기도 하고, 브릿지에서는 중심이 되는 피아노와 킥 드럼, 스네어를 제거하고 은은하고 낮은 신스 사운드를 채워 넣기도 했다.
‘Ice Slippin’은 짙은 그리움의 정서가 담겨있는 곡이다. 그러나 몰아치는 사운드가 등장하지는 않고, 우울한 톤의 반복되는 피아노와 그와 대비되는 묵직한 비트만이 등장한다. 그 또한 곡 후반부로 갈수록 페이드아웃 되는데, 이와 같이 의도적인 공백을 만들어 감정을 증폭시켰다는 점이 이 곡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또, 눈에 띄는 것은 프랭크 오션이 연상되는 브릿지 파트인데, 그 또한 자신만의 스타일로 소화해 냈다는 점에서 신선한 변주처럼 느껴졌다.
이처럼 최소한의 변주만으로 풍부한 감정을 표현해 낼 수 있는 아티스트는 흔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미 미니멀하면서도 세련된 사운드를 구현해 내는 아티스트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이번 싱글을 통해 그의 저력을 다시 한번 보여준 셈이다. 그도 훗날엔 프랭크 오션, 스티브 레이시에 이어 빌보드 차트를 꿰차는 영광을 누릴 수 있기를.
※ '미온', '배게비누', '율'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