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럼리스는 힙합 씬의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Kanye West나 Travis Scott 등 현재 힙합 씬에서 가장 큰 기여를 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의 인터뷰를 살펴보면, 프로듀싱을 하는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드럼’이다. Kanye West는 2010년대 익스페리멘탈 힙합의 방점을 찍었던 명반이라고 할 수 있는 (물론 그가 발표한 대부분의 음악이 명반에 오르기는 하지만) 6집 YEEZUS를 드럼 사운드의 기틀을 위한 ‘습작’에 비유하기도 했고, Travis Scott의 경우, 프로듀싱의 모든 과정을 통틀어서 드럼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만큼 힙합 장르에 있어서 ‘드럼’이라는 악기는 불가분의 관계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그 중요도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는 힙합이라는 장르가 ‘멜로디’가 아닌 ‘리듬’을 기반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박자에 따라 랩의 형태가 달라지며, 킥과 스네어가 어떻게 구성되느냐에 따라 힙합 안에서도 붐뱁이나 래칫, 트랩 등 여러 하위 장르로 나뉘기도 한다. 그만큼 힙합 음악에서는 ‘리듬’이 생명이고, 드럼은 이러한 리듬을 구분짓는 악기이기에 많은 프로듀서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악기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국내 힙합 씬에 올라오는 신보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드럼 사운드를 거부하는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지난 10월 15일 발매 이후 힙합 커뮤니티 등지에서 호평을 받고 있는 딥플로우와 JJK의 합작 앨범 [Occam’s Razor] 는, 무의미한 논증을 배제한 가장 단순한 것이 진실이라는 ‘오컴의 면도날’ 이라는 타이틀처럼 매우 직관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현 시점 가장 폼이 좋은 딥플로우와 JJK의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랩은 물론이고, 피처링진은 적재적소에서 훌륭히 제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 사이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두 아티스트의 보컬을 받쳐주는 비트다.
타이틀곡 ‘Occam’s Razor’ 를 들어보면, 샘플 루프가 전면으로 드러나는 반면에 드럼 사운드는 킥을 제외하고는 상대적으로 그 볼륨이 작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래퍼의 랩이 리듬감을 받쳐주고 있어서 잘 느껴지지는 않지만, 확실히 이전까지 들어왔던 일반적인 붐뱁 타입의 비트와는 느낌이 다르다. 수록곡 또한 마찬가지인데, ‘De Niro Approach’, ‘Homing Instinct’ 등의 트랙에서는 아예 드럼 사운드 없이 샘플링된 재즈 멜로디와 베이스, 랩으로만 트랙이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비트 또한 미니멀한 구성을 띄고 있기에 보다 메시지에 초점이 가고, 주제의식이 명확한 메시지는 리스너들에게 설득력 있는 음악으로 들린다.
앨범의 타이틀이 ‘Occam’s Razor’기에 이렇게 미니멀한 구성을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문이 들 수 있지만, 사실 이 같은 사운드는 작년부터 국내 힙합 씬에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Occam’s Razor]의 공동 프로듀서로도 참여했던, [Huslin, Strugglin, Survivin] 으로 혜성처럼 등장해 최근 주목을 받고 있는 프로듀서 Sun Gin의 [Arkestra] 나 올 상반기 수작으로 평가받았던 Dsel과 프로듀서 Fredi Casso의 합작 앨범 [SECOND II NONE] 등 이미 여러 아티스트들의 곡에서 앞서 힙합 장르에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던 드럼 사운드가 옅은, 심지어는 드럼이 없는 비트들이 계속해서 입지를 다지고 있다. 국내에서는 ‘네오 붐뱁’으로도 알려지며 기대를 받고 있는 장르, 'Drumless (이하 드럼리스)' 의 등장이다.
드럼리스는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이름 그대로 ‘드럼의 사운드를 최소화한 스타일의 힙합 장르’이다. 해당 장르는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붐뱁 장르에서 파생되어 BPM이나 전반적인 곡의 진행 구조가 유사한 모습을 보이지만, 붐뱁이 곡의 드럼 사운드를 샘플링하고 루핑 (Looping) 하는 방식으로 곡의 리듬을 잡아놓은 뒤 해당 비트에 추가적으로 악기를 사용해서 드럼베이스를 강조한다면, 드럼리스의 경우, 하이피칭 (High-Pitched) 된 샘플 사운드와 스트링, 건반과 같은 악기들을 통해서 메인루프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국내에서는 20년대를 기점으로 씬에서 조금씩 그 형태를 잡아가는 추세이지만, 사실 드럼리스 라고 불리는 이 장르는 훨씬 이전부터 여러 아티스트들의 작법에서 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장르의 기원에 대해 여러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인데, 과거 90-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Wu-Tang Clan의 프로듀서 RZA도 드럼이 강조되지 않는 소울이나 재즈 샘플의 루프를 자주 사용하기도 했으며, MF Doom과의 프로젝트 앨범 [Madvillainy] 의 공동 프로듀서로 알려져 있는 Madvillain 이나 The Alchemist 또한 이러한 작법을 사용했기에 시발점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2010년대 초반 Roc Marciano나 Ka와 같은 아티스트들이 [Grief Pedigree], [Reloaded] 등의 앨범을 통해 초기 형태를 확립시켰고, Westside Gunn이 소속되어 있는 곳으로 유명한 Griselda Records가 드럼리스 장르의 전성기를 열었기에, 일반적으로는 2010년대 초에 형태를 갖춘 스타일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 드럼리스 장르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된 데에는 미국의 Griselda Records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많은 힙합 아티스트들이 그렇듯 Griselda Records 소속 아티스트들의 성장 환경 또한 마약이나 갱 활동 등에 노출되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이들의 가사는 범죄와 마약, 폭력에 관한 이야기를 다뤘고, 비트 또한 소울이나 재즈 음악을 샘플링한 느와르 랩, 갱스터 랩 분위기를 띄게 되었다. 이들은 2016년을 기점으로 양질의 앨범을 발표하며 여러 추종자들을 낳았는데, 대표적으로 Westside Gun이 16년도에 발표한 앨범 [Flygod]은 타격감 있는 드럼 사운드, 러프한 질감에 중점을 둔 올드스쿨 붐뱁과 샘플 사운드를 강조한 느와르 힙합을 동시에 풀어내며 많은 호평을 이끌어냈다. 트랩과 드릴로 범벅이 된 메인스트림에 등을 돌린 힙합 팬들은 이내 곧 새로운 사운드에 열광하게 되었고, [Flygod]의 흥행을 필두로 Griselda Records의 스타일은 빠르게 확산되며 언더그라운드의 새로운 대안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서두에서 말한 대로, 드럼리스는 현재 침체화된 한국 힙합 씬에서도 유효타를 날릴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에 곧바로 yes라고 대답하기에는 몇 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다. 드럼리스가 타 장르의 가장 큰 차이를 두는 부분은 역시, 앞서 이야기한 대로 드럼이라는 중요한 악기가 빠졌다는 점이다. 드럼 사운드의 부재는 자연스럽게 리듬감의 약화로 이어지고, 때문에 비트의 다이나믹함이나 사운드내러티브를 갖추기 어렵다는 단점과 직결된다. 또한 샘플링 루프와 간결한 멜로디 프레이즈 위주의 반복되는 플롯은 어느 정도 전개가 예상되기 때문에 리스너들의 입장에서는 장르 자체가 클리셰로 다가온다는 한계를 지닌다. 한마디로 ‘듣는 재미’가 없다.
여기에 드럼리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Griselda Records의 영향으로, 현재 드럼리스를 대표하는 곡 대부분은 느린 bpm에 소울과 재즈 샘플링을 통한 느와르 랩 / 갱스터 랩의 분위기를 띄고 있다. 사운드의 다양성과는 별개로 곡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현재 국내 아티스트의 앨범을 들어 보면, 다양한 변용을 보여주기보다는 무드에 맞는 컨셔스한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그치고 있다.
결정적으로 드럼의 존재감이 줄어든 만큼, 멜로디라인과 공백을 채울 수 있을만한 프로듀싱과 랩 메이킹이 필요한데 이는 현재 낮아진 힙합의 진입장벽을 다시금 높이는 역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힙합 씬에서도 드럼리스는 트랩이나 드릴과는 다르게 장르적 특색이 강하다보니, 장르가 확산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는 우려를 내비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드럼리스가 현재 고착화된 시장에 변화의 단초가 될 수 있음을 희망한다. 드럼의 빈자리를 랩 디자인으로 오롯이 커버한다는 점은 아티스트들에게 있어 분명 높은 진입장벽으로 다가올 수 있지만, 다르게 보면 그만큼 랩 디자인으로 시도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진다는 이야기로도 들린다. 현재 힙합 씬에서 주로 소비되는 장르인 트랩이나 드릴의 경우 곡의 구성이 단순하기도 하고, 심하게는 정형화된 플로우마저 존재하다 보니 넓은 범용성과는 별개로 아티스트들의 랩 스타일은 점점 일관성을 띄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드럼리스의 등장은 시도하기 어려운 만큼 계속해서 변화를 촉구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붐뱁이라는 장르가 하드코어 힙합이나 팝 랩 등 여러 유형의 장르로 뻗어나갈 수 있었던 것처럼, 드럼리스 또한 붐뱁의 형태를 띄고 있기에 (붐뱁을 모태로 한 장르이기에) 얼마든지 다양한 장르로 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서론에서 이야기했듯 Kanye West 또한 드럼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동시에 여러 사운드를 통해 드럼리스의 장르적 변용을 시도하기도 했다. JAY-Z와의 합작앨범 [Watch The Throne]의 수록곡 ‘OTIS’나 6집 [YEEZUS]의 수록곡 ‘Bound 2’는 드럼리스와 칩멍크 소울을 결합한 형태로, 기존의 드럼리스와는 달리 비교적 경쾌한 분위기로 전개되어 힙합 팬들은 물론, 메이저에서도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었다. 아직 국내에서는 장르 초읽기 단계에 있기 때문에 장르의 구현에 보다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붐뱁 사운드가 그랬던 것처럼, 머지않아 새로운 샘플링과 프레이즈를 통해 그 가지를 뻗어나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유야 어찌됐든, 드럼리스는 현재 국내 힙합 리스너들과 플레이어들에게 매력적인 장르로 보여진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2010년부터 10년간, 트랩에만 머물러 있는 현 상황에 힙합 씬의 팬들은 물론이고 대중들 또한 점차 염증을 느끼고 있다.
변화를 갈망하고 있는 바로 이 타이밍에, 드럼리스의 등장은 분명 리스너들의 오랜 갈증을 해소시킬 한 방이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http://board.rhythmer.net/src/go.php?n=20101&m=view&s=feature
by 데이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