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IZE, 에픽하이, 정국, Conan Gray 외
제이 : 함께 기타를 연주하자던 라이즈가 또 한 번 악기를 장착했다. 이번엔 색소폰이다. SM 3.0의 타이틀이 헛되지 않게끔 이번에도 선배들과 확연한 차별점을 두었다. SM 특유의 하이라이트 연출 대신 세련미와 대중성을 더했고, 개인의 역량보다는 팀의 합을 주장한다. 인트로부터 등장하는 강렬한 색소폰 리프는 가벼운 트랙 위를 종횡무진하며 곡을 이끌고, 전작에 이어 특정 악기를 내세운 전략은 짧은 시간 내에 청자에게 음악을 각인하는데 충분했다. 여기에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장치도 적절하게 배치했다. 샤이니의 '누난 너무 예뻐'가 떠오르는 뮤직비디오, 90년대 감성의 로우 앵글 기법, 펑퍼짐한 의상은 우리를 그 시절로 안내했고, 라이즈는 친근하게 한 걸음 다가왔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이모셔널 팝'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자신들의 다양한 감정을 음악에 표현하는 독자적 장르라고 말하지만, 여느 그룹과 차별화를 두기엔 애매하다. 실제로 자신의 감정을 음악에 담지 않는 가수는 거의 없으니 말이다. 독자적 장르라면 차별화된 무언가 있어야 했다. 오래전부터 K팝에선 여러 장르를 섞는 시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감한 변주를 통해 단기간에 MIXX POP을 정체성으로 확립한 엔믹스가 그 예시이다. 그런데 라이즈의 이모셔널 팝은 그렇지 않다. 아직은 그저 트렌드에 맞는 이지리스닝 곡을 가져와 누구나 할 법한 스타일에 특정 악기를 내세워 진입장벽을 허무는 장르로밖에 해석이 안 된다. 야심 차게 내놓은 이모셔널 팝은 차별화된 전략이 아닌 해결해야 할 숙제로 전락했다.
Jason : 흑백보다는 원색에 가까운 시대다.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것들이 강한 존재감을 뿜어낸다. 이를테면 쇼츠나 릴스 같은 것들 말이다. 원색의 선명함은 예쁘지만 오래 보고 있으면 피로감을 준다. 대부분 자극적인 콘텐츠를 찾기 위해 화면을 넘기다가 지쳐버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때로는 흰색이나 검은색이 주는 여백의 편안함도 필요한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에픽하이의 음악은 무채색이다. 섬세한 피아노 멜로디와 무심한 붐뱁 비트의 미니멀리즘에는 산만함이 없다. 그저 본연의 쓸쓸한 감성을 차분하게 표현한다. 마치 흰색과 검은색의 농도를 짙게 만들기보다는 적절하게 섞어서 세련된 회색을 만들어내는 것만 같다.
‘Screen Time’ 역시 무채색이 주는 편안함이 돋보이는 곡이다. 무엇보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그렇다. ‘Screen Time’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혹시 다들 소통하고 있다는 착각에 점점 더 외로워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면서 안부를 묻는다. 다시 말해 직접 겪었던 슬픔의 감정을 가능하다면 누구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We’ve Done Something]의 ‘개화’에 담긴 '네가 뭐가 되더라도 응원할게. 널 응원할게. 나처럼 되지만 않으면 돼'라는 가사에서 이러한 가치관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무심하면서도 섬세하게, 담담하지만 진심을 담아서 전하는 위로는 편안한 안정감을 준다.
물론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은 무채색답게 음악적으로 독특하거나 신선하게 들리지는 않는다. 특유의 담백하면서도 묵직한 랩에 아련한 보컬이 더해지면서 서정성을 강조하는 작법은 ‘우산’으로 대표되는 에픽하이 감성을 만드는 일종의 공식과도 같다. 그러나 ‘Screen Time’은 에픽하이 고유의 세련된 회색으로 칠한, 여전히 매력적인 감성 힙합이다. 여담으로 한국에서 같은 이름으로 열 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한 힙합 뮤지션은 드렁큰 타이거와 에픽하이가 유일하다. [Remapping The Human Soul]처럼 더욱 직설적이고 날카로운 예전의 느낌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에픽하이 감성'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율무 : 2000년대 사운드를 끌어온 선공개 곡 ‘SEVEN’, ‘3D’와 마찬가지로 타이틀곡 ‘Standing Next to You’ 또한 정국의 맑고 청량한 보이스 이미지와는 정반대이다. 그러나 선공개 곡으로 충분히 예열을 한 덕분일까. 소년미에서 성숙한 어른미로의 변화는 거부감 없이 자연스러워졌다. 더 풍성해진 올드스쿨 사운드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며 솔로 아티스트로서의 자신감과 포부뿐만 아니라 야망까지 느껴진다. 그루 비한 보컬은 압도적인 퍼포먼스와 조화를 이뤄 정국이 아티스트로서 보여줄 수 있는 역량을 최대치로 발휘했고, 데뷔 10년 차인 지금 이 순간을 ‘황금빛’으로 만들었다.
[GOLDEN] 앨범 곳곳에는 정국의 음악적 고민의 흔적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SEVEN’, ‘3D’, 그리고 Standing Next to You’를 통해 차별화된 음악을 다뤘다면, 수록곡에서는 팝에 특화된 정국의 보컬과 감미로운 음색에 대한 기대를 충족할 수 있다. 또한 사랑에 빠진 감정을 캐치한 멜로디와 함께 경쾌하게 표현하고, 이별을 향할수록 쓸쓸한 감정을 담담하게 표현하여 서사에 따른 감정의 변화를 정교하게 나타냈다. 과거와 현대의 사운드가 공존하면서도 결국 그 안에서 정국이라는 독특한 음악적 색깔을 구축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즐겨 들을 수 있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가치 있는 앨범이 되지 않을까 싶다. 마치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더 높아지는 '황금'처럼 말이다.
제이 : 그야말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것들을 몽땅 가져왔다. 빠르게 진행되는 흐름, 친근한 멜로디, 서서히 고조되는 연출, 폭발적인 코러스. 거기다 브리지에서 강렬한 킥에 맞춰 읊조리는 보컬은 곧 있을 하이라이트를 암시하며 긴장감을 유지한다. 특히, 피아노 선율 위의 담담함이 폭발적인 보컬로 바뀌는 순간은 그의 격앙된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높은 몰입도를 자아낸다. 상대를 향한 궁금증은 처량한 내 처지를 알아달라는 간곡한 부탁이 되었고, 이내 'You're Killing Me'라는 처절한 외침으로 나타났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이 곡은 Conan Gray의 사랑 3부작 마지막 이야기로 추정된다. 이어지는 스토리라인과 같은 형식의 리릭 비디오, 동일한 오브제의 아트워크는 세 곡을 연결하는 장치로 3부작의 형태를 뒷받침한다. 지난 5월에 발매된 'Never Ending Song'에서 끝나지 않을 이야기의 씨앗을 품고, 이어 'Winner'에서 비극을 피웠다면, ‘Killing Me’에서는 비참한 현실의 부정과 인정을 반복한다.
사실 3부작과 같은 시리즈물이 주는 효과는 클 수밖에 없다. 전작의 복기와 후속작의 기대, 그 사이를 잇는 정교한 연결은 짙은 잔상을 남긴다. 이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시리즈 앨범이 활발하게 사용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관점에서 봤을 때 'Never Ending Song'과 'Winner'의 연결은 그리 매끄럽지 않다. 화자가 지칭하는 대상에 대한 확신이 쉽사리 들지 않아 한 세트로 분류하기엔 살짝 애매한 감이 있으나, 두 곡을 아우르는 ‘Killing Me’의 등장으로 마침내 'Conan Gray의 사랑'은 완성될 수 있었다. 그 결과, 대놓고 3부작을 명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섬세한 메시지의 연속은 그의 지난 사랑을 다시금 돌아보게 했다. '날 버린 네가 승자'라던 냉소적인 태도는 '넌 날 죽이면서도 살리는 존재'라는 자조적인 태도로 변모했고, 놓아달라면서도 여전히 사랑한다는 외침은 함부로 가늠하지 못할 절실한 사랑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어쩌면 세기말 감성의 투박한 리릭 비디오는 이젠 완벽히 과거형으로 남은 그의 사랑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을까.
Jason : 록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2023년은 특별하게 기억될 것이다. 지난 10월에는 롤링스톤스가 18년 만에 신곡으로 채워진 정규 앨범 [Hackney Diamonds]를 발매하더니, 이번에는 비틀스가 마지막 싱글 앨범 ‘Now And Then’을 발매했다. 1960년대를 상징하는 록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들의 신보를 들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Now And Then’은 비틀즈의 보컬 존 레논이 생전에 작업했던 데모 곡이다. 본래 비틀즈의 역사를 기록한 시리즈 앨범 [Anthology]에 수록하려 했지만, 당시에는 기술적 한계로 인해 보컬 트랙을 분리하는데 실패하면서 발매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AI를 활용해 마침내 그의 목소리를 추출하는 데 성공한 덕분에 존 레논 특유의 나른하면서도 울림 있는 보컬이 고스란히 담길 수 있었다. 물론 ‘Imagine’의 섬세한 아름다움만큼은 아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첫 소절 ‘I know It’s true’가 흘러나오고, 뮤직비디오에서 데시벨 계기판이 움직이는 순간부터 느껴지는 전율이 깊은 몰입감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이후 4분 동안 30대 존 레논의 목소리와 80대 폴 매카트니의 목소리가 대비를 이루면서 북받치는 감동을 주고, 엔딩에 이르러서는 애석하게도 작별 인사를 건네면서 진한 여운을 남겨두고 역사 속으로 퇴장한다. 정말이지 마지막까지 아주 예술적이다.
‘Now And Then’은 60년에 달하는 비틀즈의 대서사를 마무리하기 위한 상징으로 가득한 ‘엔드게임’이다. 우선 ‘Now And Then’은 오랜 친구이자 동료이자 애증의 관계였던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가 마침내 화해를 이루는 곡이다. 존 레논이 사망한지 15년이 지나서야 부인인 오노 요코가 폴 매카트니에게 ‘For Paul’이라고 적힌 데모 카세트를 전달하게 되면서 존 레논의 진심이 담긴 가사가 전해질 수 있었다. 폴 매카트니가 오랜 세월동안 곡을 발매하기 위해 노력해온 것 역시 그에게 진심을 전하기 위한 간절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또한 앨범에 함께 수록된 ‘Love Me Do’는 1962년 발매되었던 비틀스의 첫 싱글의 리마스터 버전이다. 다시 말해, 비틀즈의 시작과 끝이 모두 담겨있다. 존 레논의 스쿨 밴드에서부터 시작해 ‘브리티시 인베이전’이라는 문화적 현상을 일으키면서 록을 넘어 대중음악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모든 영광의 순간들을 관통하는 앨범이다. 돌아보니 ‘Now And Then’이라는 제목이 더욱 아련하게 느껴진다. 매일은 아니라도 분명 ‘이따금씩’ 그들이 그리울 것 같아서 그렇다.
율무 : 라로이가 2년 만에 정규 앨범을 발매하려는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코러스로 향하면서 라로이 특유의 거친 목소리는 짙어지지만, 전반적으로 그의 창법은 한층 담백해졌으며, 코러스에서 힘을 뺀 가성은 부드러운 어쿠스틱 기타와 적절하게 어우러진다. 코러스로 곡을 시작하다 보니 쉽게 지루해질 우려가 있었지만, 브릿지에서 강렬한 드럼 킥이 도입되어 긴장감을 조성해 짧은 러닝 타임 동안 강약을 효과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런 무난한 결과물만으로는 아직 라로이의 음악성을 파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Justin Bieber, Post Malone, Juice WRLD 등 수많은 거물급 아티스트와의 협업과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듯한 음악적 잔향은 라로이의 음악에 여전히 짙게 남아있다. 힙합을 기반으로 음악을 시작한 라로이가 이제는 힙합 외의 다양한 장르를 시도하며 음악의 경계를 넓혀 나가는 모습은 긍정적이나, 그만큼 라로이의 독특한 음악적 세계를 더욱 강화하고 구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STAY 걔?”라고 불렸던 그의 이름 대신 앞으로는 “라로이 걔?”로 불릴 수 있을 만큼 음악성이 확고해지길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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