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 Velvet, DEAN, 넬, AJR 외
동치쓰 : 레드벨벳은 '레드'와 '벨벳'이라는 다소 이분법적인 키워드를 활용하여 활동마다 선명한 색깔의 차이를 보여왔다. 하지만 어느 새부턴가 둘 사이의 간극은 희미해져 갔다. 작년에 발매된 ‘Feel My Rhythm’에서는 서로 상반된 우수에 찬 이미지와 따사로운 이미지를 발레와 스트링 사운드 그리고 강렬한 트랩 비트 등의 요소들로 융합하여 조화롭게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어느덧 데뷔 10년 차가 된 레드벨벳은 긴 세월을 거치며 레드와 벨벳으로 고착되어 가는 두 가지의 이미지를 하나로 묶어 본인들만의 방법으로 그 레퍼토리를 꾸준히 업그레이드해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런 과정 속에 이번 앨범에서는 누구에게나 자기 내면에 존재하는 상반되고 모순적인 모습들을 더욱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며 성장해 나간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번 앨범에서의 전반적인 곡 구성이나 진행, 비주얼적인 부분들만을 단순하게 고려한다면 벨벳의 향이 훨씬 더 짙을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어두움을 동반한 미래 예찬에 대한 내용이 물씬 느껴졌다. 타이틀곡 ‘Chill Kill’에서는 신비로우면서 스산한 마이너 코드의 진행을 시작으로 스트링과 벨 사운드가 서서히 스며들어온다. 하지만 이내 계속해서 과격하게 넘나드는 메이저와 마이너의 곡 진행을 통해 애증 관계, 양가감정, 감정기복 등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느낄 수 있는 지극히 보편적이면서 모순적인 정서가 곡 전체에서 풍긴다. 후반부에 가서는 마침내 그러한 불안함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메이저 코드로 마무리하며 비극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하며 끝을 맺는다. 곡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 정서를 따라가다 보면 아슬아슬한 불안함 끝에 진정한 나로서의 성장을 통한 황홀경까지 느낄 수 있다.
이런 구성은 앨범 전체로 확대하여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타이틀곡 바로 다음으로 이어지는 2번 트랙 ‘Knock Knock’이나 'Nightmare', 'One Kiss’ 등의 트랙들이 소위 벨벳 콘셉트를 통한 오싹함을 자아낸다면, 그 사이사이에 배치된 ‘Underwater’나 ‘Will I Ever See You Again’ 등의 트랙들을 통해서는 그보다는 더욱 침전된 정서로서 수동적으로 비극적인 상황을 받아들이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마침내 마지막 두 트랙인 ‘Wings’와 ‘풍경화 (Scenery)’를 통해서는 다시금 능동적으로 상황을 견디며 희망과 응원의 메시지를 전한다. 하지만 잔잔하면서 청량한 사운드를 가미하여 음악적으로도 마냥 기쁨을 요란하게 설파하지는 않는다. '슬픔'이란 감정을 알기에 '기쁨'이란 감정도 더욱 크고 진정성 있게 다가오는 법이다. 이제는 예전과 달리 'Happiness'라는 단어를 강 박적으로 외치며 행복을 전파하지도, 유달리 암울하게 자신을 비관하며 'Psycho'라는 단어로 스스로를 자조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복합적인 '정반합' 끝에 도달한 레드벨벳만의 진정한 성장과 희망의 메시지가 이 앨범에 담겨있다.
SOOO : 18일 발매 한 시간 전, 딘은 인스타그램 스토리로 유튜브에 오피셜 음원이 업로드된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흰색 배경에 기본 블랙 폰트로 쓴 오늘 아침까지 사운드를 수정했다는 내용. 그래서 플랫폼에 새 음원이 정상적으로 안 풀릴 수도 있다는 이야기. 그리고 Enjoy it.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냐?' 첫인상이었다. 다시 글을 읽어 보니, 오늘 아침까지라는 단어가 꽂힌다. 잘하고 싶구나, 오랜만이 라서 더. 완벽주의자들의 흔한 고민이다. ‘Die 4 You’는 그가 가장 잘하는 얼터너티브 R&B를 고수했다. 애절하게 떠나간 이를 그리워하는 가사는 어찌 보면 플랫하지만, 독보적인 음색으로 그만의 쓸쓸한 감성을 완성한다. 그레이 톤으로 맞춘 앨범 아트도 딘만의 다크한 소울을 직관적으로 전달한다. 기다림이 용납되는 그만의 개성이다.
음원 성적은 폭발적이다. 발매 한 시간 만에 멜론 실시간차트 1위를 찍었다! 19일 기준, 멜론차트 6위, 벅스에서는 1위이다. 어떠한 프로모션도 없이 이 정도의 성과는 매우 이례적이다. 딘은 원래 작업물을 끊임없이 뱉는 아티스트가 아니였다. 2010년대 말, ‘Instagram’과 ‘D(Half moon)’의 메가 히트와 '딘드밀리'로 아이콘 으로 떠올랐을 때도, 쉬지 않고 곡을 뽑아내기보다 자신만의 색깔을 쌓아 올렸다. 특히, 2019년 발표했던 ‘Howlin' 404’는 1984의 '빅브라더'를 모티프로 한 가사와 폭발적인 감수성으로 그의 아티스틱한 깊이를 보여줬다. 지하 주차장을 배경으로 다크하고 퓨처리스틱한 CG를 입혔던 뮤직비디오는 개인적으로 충격이었다. 음악도 잘하는데 비주얼 디렉팅까지 이 정도로 한다고?
올해 초, 인스타그램을 비활성화하며 돌연 잠수해버렸던 그를 대중들이 AI cover로 먼저 찾았다. 딘은 응답했고, 반응은 성공적이다. 4년 반 만에 대중 앞에 다시 선 그는 이 결과에 어떤 기분일까? 다시 한번 그의 복귀를 환영하고, 고집을 응원한다. 다른 음악도, 뮤직비디오도, 잘생긴 얼굴도 얼른 보여줘!
등구 : 시간이 흐르면 사람은 변한다. 음악도 사람이 만드는 것이니 음악도 변한다. 이 사실을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내게 이 앨범은 너무나 가혹하다.
[Dystopian's Eutopia]는 너무 새로워서 어색하거나 너무 익숙해서 지루해져 버린 곡들의 연속이었다. ‘Crack the Code’는 바이바이배드맨, ADOY 같은 밴드들이 생각나는 매우 낯선 사운드였고 개러지 록 장르의 ‘Moon Shower’는 커버 곡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넬의 색깔이 느껴지지 않는, 그저 라이브만을 위한 곡처럼 느껴졌다. 반대로 다른 곡들은 지나치게 익숙했는데, 인트로에서 16 마디 쉬고 터지는 부분, 후렴에서 기타 리프가 나오면서 밝아지는 부분 등의 구성적인 면뿐만 아니라 흔히 '넬스럽다'라고 하는 악기 톤, 멜로디와 같은 사운드는 내가 신보를 듣고 있는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이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이전까진 새로운 사운드와 음악들이 한 앨범 안에서 넬만의 감성으로 묶여 유기성을 갖는 것이 좋았는데, 이번 앨범은 남의 옷을 입은 듯한 낯섦과 자가복제로 극명하게 나누어져 버리니 특유의 감성도 길을 잃고 넬스러운 음악이라는 말의 설득력도 없어졌다. 가사가 모두 비슷한 주제를 말하고 있음에도 크게 와닿지 않는 dl유도 여기에 있다. 이전까지는 그래도 계속 넬만의 감성이 유지되니, '언젠가는 초반의 우울하고 처절했던 음악을 들려주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 미련을 버려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함께 끝도 없이 추락하고 절망하던 청춘들은 이제 너무 많은 것을 깨닫고 현실과 타협하는 어른들이 되어버렸다.
동치쓰 : 애플 광고 삽입곡으로 유명한 ‘Bang!’을 비롯하여 ‘World's Smallest Violin’ 등의 AJR의 대표곡을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곡의 템포를 마음대로 늘였다가 줄이거나 악기의 사운드를 예상치 못한데서 터뜨리는 등 전형성에서 한참 벗어난 전개였지만, 그렇다고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닌 우리에게 어느 정도는 익숙할 법한 현악기나 관악기 등의 악기로 구성되어 있기에 이들의 음악이 더욱 신선하게 느껴졌었다. 거기에 그들의 모든 음악에는 서사가 담긴 재치 있는 가사가 더해져 있었기에 희소성이 느껴지는 아티스트였다. 말 그대로 그들만의 장르를 보여준다는 느낌이 컸다.
하지만 신선함도 계속해서 접하게 되면 식상해진다고 했던가. 이번 앨범 [The Maybe Man]에서는 기존에 AJR이 보여주었던 음악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껴졌다. ‘Steve's Going to London’ 등의 트랙에서는 템포가 엿가락처럼 계속해서 늘어났다 줄어나기도 하고, ‘The DJ is Crying for Help’ 등의 트랙에서는 바이올린이 예상치 못한 파트에서 현란하게 속주를 하며 곡의 전개를 뒤엎어 버린다. 이번 앨범으로 AJR을 처음 접했다면 굉장한 발견처럼 느껴졌겠지만 아쉽게도 이번 앨범을 통해 오히려 AJR의 음악적 레퍼토리로서의 패턴을 더욱 뚜렷하게 예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재치와 쾌활함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아직까지 이들이 보여주는 음악을 대체할 수 있는 아티스트는 좀처럼 없어 보인다. 아쉽지만 그들의 음악을 여전히 플레이리스트에 넣고 재생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SOOO : 페기 구(Peggy Gou)가 R&B 아이콘 레니 크라비츠(Lenny Kravitz)가 피쳐링한 새로운 싱글 ‘I Believe In Love Again’을 발매했다. 신기한 조합이다. ‘I Believe In Love Again’은 멜로디컬한 후렴과 쉬운 가사, 페기 구 특유의 낮은 보컬로 귀에 익숙한 느낌이다. 레니 크라비츠의 음색과 이게 페기 구의 음악이라는 것만 제외하곤. 그녀는 레니 크라비츠에 대한 오랜 개인적인 애정을 밝혔다. 그가 새로운 가사를 쓰고 꽂히는 기타 리프를 만들어 냈다며 재능에 감탄했다. 다시 사랑을 믿는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 곡은 일렉트로닉/하우스 신에서의 전적에 비해서는 힘을 뺀 시도이다.
올해 여름, 페기 구의 싱글 ‘(It Goes Like) Nanana’가 인스타그램 릴스 배경음악을 정복했던 성과를 지켜봤다. ‘(It Goes Like) Nanana’는 90년대 후반에 유행했던 하우스를 리마인드하는 복고적인 흐름과 스무스한 기타 라인으로 귀를 사로잡는다. ATB의 ‘9pm(Til I Come)’의 현대적인 재해석이다. 익숙한 것은 시대를 초월한 매력을 갖고, 반복되는 'Nanana'의 쉬운 리듬은 릴스와 쇼츠에 매우 적합하다. 오렌지 숏 헤어로 돌아온 그녀는 더 이상 패셔너블한 DJ 정도의 하입이 아닌 독보적인 브랜드를 형성해 나가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I Believe In Love Again’은 이제 하고 싶은 거 다 해보겠다는 그녀의 출사표로 받아들여진다. R&B 장르에 안정적으로 안착하며 장르적 한계를 극복한 그녀는 2024년 앨범을 발매 예정이다. ‘(It Goes Like) Nanana’ 와 ‘I Believe In Love Again’이 수록될 그녀의 내년 앨범은 벌써부터 화려하다. 오랫동안 팬이었던 아티스 트를 피쳐링으로 삼고, 장르를 개척하고, 릴스 바이럴의 최정점에 선 그녀의 정식 앨범은 어떨까? PEGGY GOODS, 그녀의 굿즈가 미친 듯이 팔리는 걸 이태원 팝업에서 목격했다. 그녀의 내년 앨범이 아이콘으로만 남지 않기를 바라며. 영리하게 지금의 하입을 이용하기를. 사실은 그녀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등구 : 요즘 개성 없이 과거의 것을 모방하기만 하는 디스코와 (Weekend를 연상시키는) 신스팝이 슬슬 지루하게 느껴져, 내가 레트로에 싫증이 난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그게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만약 그랬다면 인간 Y2K 그 자체가 된 PinkPantheress를 사랑할 수 없었을 테니까.
흥미롭게도 [Heaven knows] 속 영국 소녀는 한국인의 감성을 정확히 저격하고 있다. 여리여리한 보컬에 더해진 리드미컬한 UK Garage와 브레이크 비트에서는 싸이월드 BGM으로 빠질 수 없는 시부야케이의 향기가 물씬 난다. 하지만 당시에 많이 들리던 하우스룰즈, 클래지콰이, 인스턴트 로맨틱 플로어 같은 아티스트들이 아기자기하고 로맨틱한 느낌이었다면, PinkPantheress는 싸이월드의 우울하고 어두운 감성까지 건드리며 우리의 향수를 더욱 자극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과거의 것을 답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마치 기계로 피치를 높인 듯한 고음역대의 보컬을 들려주며 귀를 간지럽히는 시그니처 음색을 더욱 강조하기도 하고, 진성을 섞어 힘 있게 내뱉기도 하면서 보컬리스트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DnB, UK Garage와 함께 Y2K 감성을 가져가면서도 드릴 비트나 드림 팝을 세련되게 섞으며 장르적 영역을 넓히고 있다. 이것이 진정 아티스트가 다름에도 음악은 똑같은 양산형 레트로가 아닌 바람직한 뉴트로가 아닐까 싶다. 레트로는 죄가 없었다.
※ '등구', 'SOOO'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