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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멘트 Dec 06. 2023

앨범은 플레이리스트가 아니에요

크러쉬의 새 앨범 [wonderego]가 남긴 씁쓸한 뒷맛

약 10년 전 Frank Ocean, Miguel, The Weeknd 등의 아티스트를 필두로 얼터너티브 R&B가 본격적으로 장르로서 두각을 드러내던 때, 비슷한 시기의 국내 또한 특정한 장르를 고수하지 않는 라이징 스타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렵 여러 아티스트들의 크레딧에서 공통적으로 자주 보였던 이름이 있었는데, 이것이 필자가 기억하는 Crush (이하 크러쉬)라는 뮤지션의 시작이었다. 

Supreme Team - 그대로 있어도 돼 (Feat. Crush)


자신이 비단 한 곳에만 발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크러쉬는 데뷔 이후 다수의 EP와 싱글을 발매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구현해나가고자 했다. 첫 정규 앨범 [Crush On You]에서는 Slow Jam (슬로우 잼), New Jack Swing (뉴 잭 스윙) 등 R&B의 다양한 하위 장르를 아티스트만의 스타일로 유려하게 풀어내 대중과 평단 모두의 호평을 받기도 했으며, 이후 발매한 싱글 [Sofa]나 [잊어버리지 마]에서는 감성적인 발라드를 통해 리스너들에게 대중적인 멜로디 또한 소화해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 밖에도 퓨쳐베이스 사운드를 중심으로 랩 퍼포먼스와 보컬을 넘나드는 EP [Interlude]나 90년대 R&B 장르의 재현에 집중한 정규 2집 [From Midnight To Sunrise]에 이르기까지, 11년이라는 시간 동안 크러쉬는 한국 R&B 씬의 최전선에서 트렌드에 매몰되지 않고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아티스트가 지니고 있는 음악적 고민을 녹여내왔다. 


그리고 지난 11월, 약 4년만에 정규 3집 [wonderego]로 돌아온 크러쉬는 무려 19트랙이라는 앨범 볼륨이 말해주듯 오랜 시간 동안 커리어를 이어가며 쌓아왔던 레퍼런스를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크러쉬 (Crush) - [wonderego]


앨범은 마치 크러쉬의 지난 디스코그래피를 되짚어보듯 그간에 아티스트가 선보였던 모든 스타일과 프로덕션이 총망라된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과거 N.E.R.D의 Pharrell Williams나 Justin Timberlake를 연상시키는 Contemporary R&B (컨템포러리 R&B) 장르의 타이틀곡 ‘흠칫 (Hmm-cheat)’, 리드미컬한 기타 사운드를 통해 청량감을 주는 ‘No Break’ 등 초반부에서는 전체적으로 펑키한 트랙들을 배치함으로써 초기 크러쉬의 모습을 좋아했던 올드 팬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준다. 이어지는 중반부에서는 Drum&Bass (드럼 앤 베이스) 기반의 ‘EZPZ’ 나 일렉트로니카 프로듀서 Mount XLR과 함께 프로듀싱한 ‘GOT ME GOT U’ 등 최근 유행하고 있는 브레이크비트 기반의 얼터너티브한 트랙들로 구성해 아티스트의 장르적 스펙트럼을 넓히고자 하는 시도가 돋보이며, ‘Ego’s Theme (Interlude)’를 기점으로 전개되는 후반부에서는 90년대 R&B 사운드의 고증이 보이는 트랙 ‘A Man Like Me’나 재지한 편곡으로 구성된 ‘산책 (Harness)’과 같은 트랙들이 주를 이루면서 전체적인 흐름을 마무리짓는다. 


크러쉬 (Crush) - A Man Like Me


이렇듯 [wonderego] 는 디스코그래피 중 가장 큰 볼륨을 자랑하는 앨범 답게 감상하다 보면 아티스트가 활동해온 그간의 모든 레퍼런스가 집대성된 결과물과 마주하는 인상을 받는다. 초반부의 트랙들에서는 데뷔 초 크러쉬의 댄서블한 이미지가, 중반부는 [wonderlost]로 대표되는 일렉트로니카 베이스의 실험적인 음악들이, 후반부에서는 재즈나 90년대 R&B 사운드의 재현에 집중했던 시기가 연상된다. 때문에 그동안 아티스트의 음악을 기대했던 이들에게는 이 앨범이 마치 ‘종합선물세트’와도 같은 이미지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러한 비유가 무색하게, 이번 [wonderego]에 대한 리스너들의 반응은 어딘가 모르게 아쉬움이 남는다. 누적치를 감안해도 그간 발매했던 앨범들의 멜론 좋아요 수보다 낮은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Rate Your Music 등의 음악 커뮤니티에서도 기대한 만큼의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는 의견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2022년 제대 후 발매했던 싱글 ‘Rush Hour’가 큰 흥행을 이끌었던 점을 생각하면 이번 앨범에 대한 아쉬운 평가는 더욱 크게 다가온다. 


크러쉬의 신보가 아쉽게 들리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의견은 결국 ‘앨범이 주는 설득력이 부족’ 이 아닐까 싶다. 앞서 이야기했듯 [wonderego]의 각 트랙들을 살펴보면 정통 R&B장르에 대한 고증, 최근 유행하는 다양한 장르 사운드와의 결합, 크러쉬만의 강점인 대중적인 코드의 운용이 더해져 레퍼런스를 훌륭하게 재현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싱글 단위로만 바라본다면 말이다. 하지만 앨범으로 넘어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각 트랙들은 현재의 음악들이 추구하는 트렌드만을 제시할 뿐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는 못한다. 타이틀곡 ‘흠칫 (Hmm Cheat)’ 에서는 Pharrell Williams가 연상되는 00년대 컨템포러리 R&B 사운드가, ‘EZPZ’에서는 최근 주목받고 있는 아티스트 PinkPantheress로 분한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는 이렇다 할 교집합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연결하는 것이 앨범의 메시지인데, 본 앨범에는 이렇다 할 메시지가 담겨 있지 않다.

크러쉬 (Crush) - EZPZ
PinkPantheress - Nice to meet you (feat. Central Cee)


여기에 과도하게 늘어난 트랙 수 또한 앨범 집중도를 분산시키고 있는데, 볼륨을 위해 앨범의 전체적인 흐름에 맞지 않는 몇몇 트랙의 배치는 트랙 간의 유기성을 해치며 리스너들이 앨범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는 곧 앨범이 말 그대로 단순한 레퍼런스의 나열로 보이게끔 작용하며, 앨범이 가진 정체성을 모호하게 하는 문제를 일으킨다. 마치 잘 짜여진 플레이리스트를 듣는 듯한 감상에만 그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설득력의 부족은 비단 크러쉬라는 메이저 아티스트가 가진 문제가 아니다. 플레이리스트 문화의 확산으로 인해 앨범이 아닌 싱글 단위의 작업물이 늘어나게 되면서 아티스트들은 더 이상 서사를 담아내는 앨범을 선호하지 않으며, 그보다는 리스너들이 선호하는 취향의 음악을 최대한 가져오는 데 집중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아티스트의 개성은 줄어들고, 그 빈자리를 트렌드가 차지한다. 비슷한 의미로 힙합 씬의 경우 오래전부터 차트에서 Pop Rap (팝 랩) 곡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으며, (최근 가사 대필 논란이 있었던 김하온이나 아우릴 고트 등 이미 여러 아티스트들 또한 비슷한 결의 음악들을 선보이고 있다.) 인디 음악 시장에서는 얼터터티브, 슈게이징 등 예전 90년대의 락 장르들이 인기를 얻자 김뜻돌, 윤지영 등의 아티스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장르 리바이벌을 시도하고 있다. 장르 음악이 가지고 있던 개성은 희미해지고, 시장의 양상은 엔터테인먼트 시장과 비슷한 모습을 띄게 되었다.

김하온(HAON) - Over You


트렌드를 캐치한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트렌드를 파악하여 아티스트의 정체성을 공고히하는 것은 시장에서의 우위를 선점하거나 나아가 아티스트 개인의 커리어를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정체성이 없는 단순한 오마주는 아티스트의 작품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서의 음악으로 끌어내린다. 현재 R&B 시장의 최전선에 있는 아티스트로 자리매김한 크러쉬의 이번 앨범이 어쩌면 그 대표적인 사례로 남을지도 모르겠다. 뒷맛이 씁쓸하다.


발매 후 아티스트의 인터뷰를 살펴보면 앨범은 크게 ‘Wonder’ 와 ‘Ego’ 두 파트로 분류되어 있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보았을 때, 앨범은 세 파트로 분류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기사 출처

https://www.gqkorea.co.kr/?p=261247




by 데이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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