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벨벳 [Perfect Velvet – The 2nd Album]
2014년, 아프리칸 사운드의 ‘행복’으로 데뷔하여 밝고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하던 레드벨벳은 이내 얼마 되지 않아 S.E.S.의 ‘Be Natural’을 리메이크하며 우아하고 성숙한 분위기의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후의 첫 미니앨범에서도 ‘Ice Cream Cake’와 ‘Automatic’을 더블 타이틀로 택하며 의식적으로 ‘레드’와 ‘벨벳’ 사이에 경계를 두며 두 개의 상반된 콘셉트를 지향했다.
세련된 사운드의 ‘Ice Cream Cake’와 ‘러시안룰렛’, 단어 반복과 복잡한 구성의 ‘Dumb Dumb’과 ‘Rookie’, 팀의 최대 아웃풋 ‘빨간 맛’까지 데뷔 2~3년 만에 레드벨벳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빠르게 구축했지만, ‘벨벳’ 콘셉트는 왠지 모르게 물에 뜬 기름처럼 팀과 어울리지 못했다. ‘7월 7일’이 타이틀곡이었던 미니앨범 [The Velvet]은 곡 각각의 완성도를 떠나 너무 급작스러운 콘셉트 변화였으며 ‘벨벳은 차분하고 조용한 발라드’라는 강박에 사로잡힌 듯했다.
하지만 ‘빨간 맛’의 대히트 이후 레드벨벳(과 SM)은 비로소 진짜 장기를 꺼내 들었다. 디스코, 팝, EDM, 알앤비 등 다양한 장르로 무장한 웰메이드 팝 앨범으로 자연스레 잊히는 듯했던 ‘벨벳’ 콘셉트를 완벽히 소화해냈다. 기존 벨벳 콘셉트의 명확한 레퍼런스나 다름없던 ‘Be Natural’의 노선을 벗어났고, 이전의 [The Velvet]에서의 실책을 보완하기 위해 키치한 연출의 ‘호러’를 택했다.
특히 타이틀곡 ‘피카부’의 전면에서 그 분위기가 잘 느껴진다. MV는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다 엔딩에선 결국 남자 주인공인 피자 배달부가 레드벨벳 멤버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피카-피카-부’라며 ‘까꿍’을 깜찍하게 반복하면서도 ‘술래는 너로 정해졌어’, ‘재밌을 거야 끼워 줄게’ 등 상대의 주도권과 능동성을 완전히 빼앗아버리는 약간의 섬뜩함도 연출한다. 이 불완전한 관계에서 오는 뒤틀린 마음은 이후의 ‘Bad Boy’와 ‘Psycho’, 최근의 정규 앨범 [Chill Kill]까지 이어지며 벨벳 콘셉트 앨범의 또 다른 기조가 되었다.두 번째 트랙 ‘봐’에서는 다층으로 쌓은 보컬과 신비한 분위기로 ‘피카부’와 결을 같이하고, ‘I Just’는 레드벨벳의 음악 중 가장 큰 스케일의 사운드와 편곡을 사용한다. 부드럽고 우아한 벨벳 콘셉트의 앨범이지만 SM이 추구해 온 일렉트로닉 음악을 어떻게든 안고 가겠다는 포부가 강하게 드러난다. 이어지는 ‘Kingdom Come’은 레드벨벳의 알앤비 중 가장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며 메인보컬 웬디의 존재감을 실감케 한다.
‘I Just’와 ‘Kingdom Come’에 이르며 꽤 무거워진 분위기를 ‘두 번째 데이트’와 ‘Attaboy’의 유쾌함으로 환기하는데, 이 부분에선 활기를 띠는 정규 1집 [The Red]가 떠오르기도 한다. 레드와 벨벳이 조화롭게 결합된 지점으로, 두 영역을 의식적으로 분리하지 않고 입맛에 맞게 언제든지 상호보완적으로 사용하겠다는 의지다. 이내 ‘Perfect 10’ – ‘About Love’ – ‘달빛 소리’의 발라드 라인으로 이어지며 몽환적이고 따뜻한 분위기로 앨범을 마무리한다.
[Perfect Velvet]은 이렇게 다양한 장르를 차용하고, 벨벳을 중심으로 레드를 적절히 드나들며 다양성을 추구하고 있다. 레드벨벳의 새로운 국면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 팀이 쌓아온 음악의 이모저모를 느낄 수 있다. ‘피카부’의 정신없는 드롭은 ‘Dumb Dumb’과 ‘러시안룰렛’에서, ‘I Just’와 ‘두 번째 데이트’의 사운드는 ‘Campfire’의 강렬한 베이스에서 맛본 바 있다. ‘Kingdom Come’과 ‘Perfect 10’은 ‘Be Natural’과 ‘Automatic’의 고상함을 따랐고, 음반을 마무리하는 ‘About Love’와 ‘달빛소리’의 서정성은 ‘My Dear’와 [The Velvet]이 떠오른다. 음반의 정체성이 ‘레드벨벳’스러운 팝으로 묶일 수 있는 이유다.
내부적으로도 콘셉트 수립에 대해 이 앨범의 만족도가 컸는지, 이 앨범 이후로는 레드와 벨벳을 구분하기 보다 적절하게 융화한 콘셉트의 앨범이 많이 발매되었다. ([Queendom - The 6th Mini Album], [‘The ReVe Festival 2022 - Feel My Rhythm’], [‘The ReVe Festival 2022 - Birthday’] 등) 단일 콘셉트의 뚜렷한 각인보다는 타협의 길을 택한 것이다. 레드벨벳의 디스코그라피가 안정화 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이 앨범이 갖는 의미가 굉장히 크다.
‘Perfect’라고 자신감 있는 단어 선택이 탁월한 앨범이다. SM엔터테인먼트가 쌓아 온 전자음악에 대한 나름의 고집과 레드벨벳이라는 팀의 음악적 정체성, 각 멤버들의 보컬 역량과 걸그룹으로서 대중성의 성취까지, 하나의 음반으로 다방면에서 좋은 수확을 거둘 수 있는 작품이었다.
쉽지 않겠지만, 이보다 좋은 앨범이 언젠간 또 나오리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