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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멘트 Apr 13. 2024

LE SSERAFIM은 누구를 향해 소리치는가

LE SSERAFIM - [EASY]

추락과 고통 속에서도 끊임없이 날아오를 르세라핌


데뷔 앨범 [FEARLESS]부터 독보적인 콘셉트와 메시지를 이어 온 르세라핌은 미니 3집 [EASY]를 통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이들은 두려움 없고(FEARLESS), 쉽게 깨지지 않으며(ANTIFRAGILE), 그렇기에 금기를 깨고(UNFORGIVEN) 나만의 길을 걷자는 메시지를 던졌다. ‘세상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큰 줄기의 스토리를 전개한 르세라핌의 마음속 깊은 곳의 이야기를 우리는 미니 3집 [EASY]로 엿볼 수 있다.


미니 3집 [EASY]는 지금까지 보여줬던 당당함과 자신감 이면의 불안과 고민을 표현한다. 그간 한 번도 드러내지 않은 초조함과 고통이라는 날것의 감정을 다루며, 그 속에서도 굳건히 걸어온 르세라핌의 모습을 담았다.


기독교 및 구약성경 속 최고 위급의 천사, 어원으로 ‘타오르는 자들’이라는 의미의 세라핌(seraphim)을 활용한 팀명처럼, 르세라핌은 성경 속 모티프를 다양하게 활용하여 콘셉트 속에 녹여낸다. Sheer Myrrh 버전 콘셉트 포토에서 멤버들은 ‘가시관’을 쓰고 화면을 바라보고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직전의 사건 동안 예수의 머리에 씌워졌던 가시관은 예수의 고난을 상징하는 소재로 활용된다. 여기에 예수의 고통과 죽음을 의미하는 ‘몰약’이라는 뜻의 ‘Myrrh’를 콘셉트 명으로 사용하여 르세라핌 멤버들이 받은 고통과 상처를 강조하고 있다.


타이틀곡 ‘EASY’의 뮤직비디오에서도 이러한 모티프를 활용하고 있는데, 바로 피에타를 활용한 장면이다. 피에타(Pietà)는 십자가에서 사망한 예수를 내려 안고 슬피 우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묘사하는 기독교 예술의 주제로, 예수의 죽음을 나타낸다. 르세라핌은 성경 속 모티프들을 통해 지금까지 다루지 않았던 마음속 고통을 표현한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부활했듯, 불안 속에서도 또다시 앞으로 나아갈 것을 노래했다.




르세라핌은  이리 화가  있나요?


미니 3집 [EASY]의 음악만큼 화제가 된 것은 바로 EASY TRAILER 'Good Bones'다. 런웨이를 활용한 독자적인 트레일러는 매번 화제가 되었으나, 이번 트레일러는 파격적인 허윤진의 팬츠리스 룩과 함께 ‘내레이션’으로 이전보다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마이클 조던의 나이키 광고 ‘Maybe it’s my fault’가 떠오르는 'Good Bones' 트레일러는 남들에게는 쉬워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많은 실패를 겪은 르세라핌을 담아낸다. 트레일러 속 멤버들은 넘어지고 다치면서도 당당하게 앞을 향해 걷는다. 이들이 걸어온 것은 그저 쉬운 길이 아니라, 피 같은 열정과 노력으로 ‘쉬워 보이게 만든 길’이라는 것이다.


내가 또 기회를 잡아서 기분 나쁘니? 나만 계속 운이 좋은 거 같아서 화가 나니? 세상이 우리한테만 쉬운 거 같니? (EASY TRAILER  'Good Bones' 中)


그러나 대중은 트레일러 속 내레이션에 의문을 던지며 메시지의 공허함을 꼬집었다. 누구도 이들을 향해 화를 내지 않았는데, 르세라핌은 대체 누구를 향해 이렇게나 공격적인 메시지를 던지냐는 것이다. 르세라핌의 메시지에 대한 갑론을박은 이들을 향한 관심만큼이나 이어졌다.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공격 상대를 향한 섀도 복싱(shadow boxing), 허공 공격이라는 입장과 함께 르세라핌을 향한 이러한 공격 자체가 메시지를 완성한다는 입장까지, 앨범이 발매된 후에도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그렇다면 과연 르세라핌이 말하고자 하는 진짜 메시지는 무엇일까?




진짜 메시지 : 르세라핌의 소년 만화


르세라핌은 멤버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서사로 완성된다. 아이즈원과 AKB48을 거쳐 아이돌로서는 탄탄대로를 걷고 있는 채원과 사쿠라, 발레리나를 그만두고 걸그룹 멤버가 된 카즈하,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통해 능력을 증명하고자 했던 허윤진, 멤버들은 같은 세대의 타 걸그룹들보다 더 많은 서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르세라핌에게 개별성을 부여한다. 멤버들이 아니라면 애초에 이들의 메시지는 다룰 수조차 없고, 팀 자체가 르세라핌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실제적 개별성을 가진 르세라핌의 ‘진짜’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금까지의 앨범 텍스트를 분리할 필요가 있다. 이전의 세 앨범을 미니 1집 [FEARLESS] / 미니 2집 [ANTIFRAGILE]과 정규 1집 [UNFORGIVEN]으로 나눠보자. 구분하는 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바로 ‘토슈즈(toe shoes)’의 등장 유무이다.


멤버 카즈하의 과거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소재인 토슈즈는 미니 1집 [FEARLESS]의 트레일러 ‘The World Is My Oyster’와 미니 2집 타이틀곡 ‘ANTIFRAGILE’의 뮤직비디오에서 등장하며, 앨범의 메시지를 현실과 결부된 것으로 느끼게 만든다. 특히 ‘ANTIFRAGILE’ 속 카즈하의 ‘잊지 마 내가 두고 온 toe shoes’, 김채원과 사쿠라의 ‘무시 마 내가 걸어온 커리어’라는 직설적인 가사는 르세라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에 더욱 현실성을 더한다. 이러한 장치들로 인해 우리는 르세라핌 앨범의 이야기가 멤버들의 실제 서사, 즉 현실과 연결된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데뷔를 위해 달려온 멤버들의 과거와 상처, 세상의 차가운 시선과 높은 기대치라는 시련,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이 르세라핌만의 길을 개척하겠다는 각오는 멤버들의 실제 서사와 연결되며 그룹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규 1집 [UNFORGIVEN]의 이야기는 위의 두 앨범과는 다른 느낌이다. 불타는 날개를 떼어내고, 사이보그 팔의 르세라핌은 ‘나랑 저 너머 같이 가자’고 외치며, 경계 너머의 세계를 향한 새로운 여정의 시작을 알린다. 또다시 나답게 걸어가자는 메시지를 짚었다. 이렇게 같은 이야기만 반복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르세라핌의 앨범은 오히려 이들이 세상의 평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룹의 정체성이 이미 확고함에도 이제 출발해 보자는 메시지를 굳이, 또 한 번 짚어주는 이유는 바로 여기서부터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UNFORGIVEN]부터 이들의 이야기는 현실적이기보다 판타지적이다. ‘혼자 하면 방황이지만 함께하면 모험이 된다’는 앨범의 메시지는 르세라핌의 세계관을 다룬 판타지 웹툰 <크림슨 하트>의 대표적인 구호이다. 


<크림슨 하트>는 안전하지만, 획일화되고 억압된 울타리인 ‘레퓨지아’에서 벗어나 미지의 땅인 ‘언노운’으로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로, 평행 세계 속 르세라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저 없이 모험을 떠나면서 성장하는 여성들의 주체성을 평면이 아닌 실체로 느낄 수 있도록 했다는 <크림슨 하트>의 기획 의도는 르세라핌의 앨범 텍스트와 닮아 있다. 결국 [UNFORGIVEN]는 르세라핌의 세계관을 그려낸 창작물의 구호를 앞세워,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르세라핌의 모험과 세계가 시작될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르세라핌의 이야기는 현실에 던지는 메시지보다는 새롭게 시작되는 소년 만화적 세계관, 핍진성 있는 픽션으로 이해해야 한다.




르세라핌의 메시지가 와닿지 못하는 이유


르세라핌의 급격한 텍스트 변화를 대중의 입장에서는 알아채기 쉽지 않다. 뮤직비디오와 트레일러에 판타지적인 요소가 가미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판타지 세계인지, 앨범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비유법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UNFORGIVEN]부터 르세라핌 앨범의 공허함에 대한 논쟁이 시작된 것만 봐도 대중은 이들의 메시지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실과 결부된 [FEARLESS], [ANTIFRAGILE]에서 르세라핌 표 소년 만화의 시작을 알리는 [UNFORGIVEN]이 완전히 분리되지 못했고, 이로 인한 대중의 메시지 오독은 당연한 수순이다. 대중은 르세라핌이 비슷한 이야기만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르세라핌의 앨범이 여전히 실제적이라고 느끼는 이유는 이전 앨범에서 보여준 현실적 장치(토슈즈)가 대중의 인상에 강하게 남아있고, 이를 뛰어넘어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을 알릴 만한 세계관의 장치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UNFORGIVEN]에서 소년 만화로의 전환은 매끄럽지 못했고, 그다음 앨범인 미니 3집[EASY]에서도 이를 충분히 이해시키지 못했다. 이러한 흐름에서 아이돌이라는 위치에서 발화하는 르세라핌의 혁명적 메시지는 대중에게 의문을 불러온다. 물론 아이돌 산업의 생태계와 이들만의 고충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현대판 귀족이라 불리는 아이돌이 던지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추악한 세계’라는 이야기는 공감을 얻기 힘들다.


실제적 개별성을 획득하며 정체성을 다진만큼 르세라핌이라는 그룹과 현실의 서사는 떼어놓을 수 없다. 어떻게 보면 메시지의 공허함을 향한 대중의 시선도 이들의 메시지와 연결되고, 이로 인한 관심도 마치 노이즈 마케팅처럼 이어진다. 그러나 트레일러 'Good Bones'를 향한 논쟁처럼 반감이 점점 커질 경우 르세라핌의 목소리는 더욱 와닿기 힘들다. 과연 르세라핌의 세계, 진짜 메시지를 짚어줄 것인지, 지금과 같은 선택을 할지 다음 앨범의 방향성을 선택해야 할 때이다.




by. 별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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