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PR IAN, SUMIN/Slom, 박쥐단지, Charli XCX 외
벤느 : DPR LIVE는 힙합, DPR CREAM은 밴드 사운드 위주의 일렉트로닉이라는 뚜렷한 색채가 있다면 DPR IAN은 앞선 둘에 비해 보편적인 조커라는 컨셉과 사운드들을 사용해 특별함을 느끼진 못했다. 하지만 ‘SAINT’에서는 새로운 사운드를 구사하고 컨셉을 확고히 하며 DPR IAN이라는 아티스트의 음악 세계관을 확장했다.
첫 트랙 ‘SKINS’부터 비파, 가야금, 해금, 첼로, 바이올린 등 동서양의 스트링 사운드와 눅눅한 신스 사운드의 신선한 조화가 돋보이며, 타이틀 곡 ‘SAINT’에서 역시 오리엔탈 풍의 사운드를 전면에 배치하고 성스로운 신스 사운드로 성자라는 곡의 컨셉을 확실히 했다. ‘LIMBO’로 넘어가서는 트랙들에 사용된 악기가 전반적으로 비슷하다 싶으면서도 EDM이라는 장르를 새롭게 시도했다는 점에서 음악적 성장을 분명하게 보여줬다.
세계관도 더 이상 우리가 알던 조커에 머무르지 않는다. 성직자라는 소재를 통해 악으로 세상을 구원한다는 파괴적이고 기괴한 스토리를 가져왔다. 다크 판타지적인 요소들을 더한 독창성도 돋보인다. 선과 악의 경계에서 확실한 악으로 넘어간 DPR IAN이 앞으로 어떠한 이야기를 들려줄지 다음 챕터가 매우 궁금해진다.
쥬니 : 2021년에 처음 시작된 슬롬과 수민의 콜라보는 인디씬과 힙합씬을 좋아하는 청취자들을 위한 깜짝 선물과도 같았다. 생각도 못 한 둘의 시너지는 첫 정규 앨범 [MINISERIES]로 한국대중음악 알앤비&소울 음반 부분 최우수상을 수상하는 등 음악성을 증명하며 코어층을 확보했다. 신호등의 앨범 설명에서 "어딘가에서 만난 두 사람, MINISERIES 2를 기다리며."라고 말했듯이, 이번 싱글은 그저 일회성 콜라보가 아닌 새로운 믿고 듣는 조합을 확정하는 선물 같은 예고편이다.
DnB와 보사노바의 조합은 힙합과 알앤비를 모두 응용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서로 다른 두 장르의 색채를 죽이지 않으며 조화롭게 합을 이뤄, 반복된 멜로디로 인해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곡을 더욱더 풍부하게 만들었다. 보사노바의 색채가 강한 인트로와 마치 재즈에서 차용한듯한 스캣위주의 가사와 멜로디를 통해 수민의 보컬 톤을 돋보이게 했다. 또한, 곡의 멜로디가 끝난 뒤 슬롬의 이름 언급과 함께 보컬 없이 16마디 동안 트랙만 나오는 구간은 슬롬의 프로듀싱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3분이 채 안 되는 보다 짧은 길이의 곡이지만, 다음 앨범의 예고편이라는 곡 자체의 의도에 잘 맞는 깔끔한 마무리였다.
등구 : 국내 인디 씬의 새로운 뮤지션 컬렉티브 박쥐단지의 첫 번째 앨범은 일렉트로니카적 요소로 묶이면서도 각 아티스트의 색이 뚜렷하게 살아있다. 어딘가 비틀린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김도언 특유의 앰비언트 텍스처와 악기 운용, 실리카겔로 익숙해진 김한주의 사이키델릭한 사운드, 이이언의 냉소적인 무드, 그리고 다른 여러 아티스트들의 음악들은 쉽게 이어지지 않을 듯하면서도 동일한 89BPM과 E♭key 안에서 완벽히 조화를 이루고 있다. 덥스텝과 앰비언트, 동양풍 사운드가 섞인 얼터너티브 R&B가 순서대로 이어지는데도 전혀 몰입도가 깨지지 않는 것도, 의도적으로 리듬을 뚜렷하게 찍지 않거나 3박자로 구성하는 등의 리듬적인 바리에이션이 더 매력적으로 들리는 것도 모두 같은 형식을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음악적인 부분 외에 또 하나 주목하고 싶은 점은 이 앨범이 '컴필레이션'이라는 것이다. 국내 힙합 씬에서는 그래도 레이블 단위로 종종 발매되는 편이지만, 국내 밴드 씬에서는 유통사의 주도 하에 발매되는 경우 외에는 찾아보기가 어려울뿐더러, 최근에는 그마저도 거의 사라진 추세이다. 컴필레이션 앨범은 한 앨범 안에서 여러 아티스트의 음악을 들을 수 있어 디깅의 수고스러움을 덜어주면서도, 생소한 아티스트의 음악을 쉽게 접할 수 있게 한다. 특히나 이 앨범은 김한주와 이이언의 인지도로 인해 더 많은 관심을 받을 수 있을 거라 기대될 뿐만 아니라 새로운 네이밍과 같은 테마로 모든 곡을 유기적으로 묶으며 음악성 또한 놓치지 않는다. [Bat Apt.] 만으로 갑자기 국내 인디 씬에 엄청난 트래픽이 발생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이와 같은 시도들이 늘어난다면 충분히 유의미한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까 예상해 본다. 이 앨범이 인디 붐의 초석이 되었으면 하는 작은 소망.
등구 : 눈 아픈 형광색 위에 평범한 폰트로 써진 brat. 성의 없는 저화질 앨범 표지는 앨범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기는커녕 그 무엇보다 이번 앨범의 Charli XCX를 완벽히 표현해 내고 있다. 찰리는 자신감 넘치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지만(‘360’, ‘Von dutch’ 등), 그와 반대되는 열등감과 우울, 불안을 담아내기도(‘Sympathy is a knife’, ‘I might say something stupid’ 등) 했다. 그리고 이런 내면의 솔직한 모습을 많은 사람들을 춤추게 하는 외면적인 클럽 뮤직을 통해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 제멋대로인 ‘brat’ 그 자체 아닐까.
그렇다고 음악도 제멋대로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하이퍼 팝이 가미된 일렉트로닉 앨범임에도 사운드적으로 과하다는 느낌 없이 팝이라는 틀 안에 정확히 들어간다. 클럽 뮤직 그 자체인 ‘Club classics’, 가볍게 듣기 좋은 팝 ‘Talk Talk’, 레이브 파티에서 틀어야 할 것 같은 ‘Von dutch’, SOPHIE를 추모하는 발라드 트랙 ‘So I’ 등 다양한 곡들이 절제된 프로덕션 안에서 계산적으로 배치되어 15 트랙이라는 큰 볼륨이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다른 일렉트로 하우스 앨범에서 종종 느껴지던 피로감은 캐치한 탑라인과 트랙 구성을 통한 놀라운 강약 조절로 인해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곧 찰리의 팝적인 감각에 기인한 결과일 것이다. 그녀가 PC뮤직과 함께 하이퍼 팝 씬을 이끌 수 있었던 데에 그녀가 영향력 있는 팝스타였기 때문도 무시할 수 없는 것처럼, 찰리는 대중의 귀를 사로잡는 캐치한 멜로디와 프로덕션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쥬니 :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을 언급할 때 페기구를 빼놓고는 논할 수 없다. 음악과 패션계를 넘나드는 핫한 아이콘으로 한국보다는 해외에서 더욱 인지도가 높은 한국인 여성 DJ이다. DJ 음악이 가장 대중화돼 있는 유럽권에서 페기구는 마이너 했던 90년대 하우스, 테크노 위주의 음악을 당당히 메인스트림으로 끌어올렸다.
이번 앨범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타이틀곡 ‘Back to one’이 전체 한국어 가사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해외에서 호평받은 ‘Nanana’와 선공개 곡이었던 ‘I believe in Love Again’과 같이 영어로 된 가사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었다. 이는 한국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확립시키는 선택이었다.
첫 번째 정규앨범인 만큼 연주, 작곡, 작사, 믹싱 등 모든 부분에 페기 구의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었다. 자신의 음악적 색깔을 정의하듯, ‘Back to One’에서는 90년대 하우스와 테크노의 근본적인 사운드를 많이 찾을 수 있었다. 쏘우 신스, 벨 사운드, 트럼펫, 다듬어지지 않은 드럼튠, 엇박으로 나오는 코드를 사용한 신스 패드, 리버브가 많이 걸린 보컬 튠 등 90년대 EDM이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줬다. 또한 중간에 나오는 "졸라 흔들리네"와 같은 파격적인 가사를 통해 복고의 느낌을 확실하게 가져갔다. 많은 관심 속 발매된 첫 번째 정규앨범은 그녀의 음악적, 가치관적 정의를 확실하게 보고 들을 수 있는 명쾌한 답이었다.
벤느 : 봄에 빌보드를 강타한 ‘ESPRESSO’는 ‘FEATHER’와 같은 디스코팝, 연이어 이번에 선공개된 ‘PLEASE PLEASE PLEASE’ 역시 ‘ALREADY OVER’와 같은 컨트리 음악이다. 곡의 구성이나 장르 측면에서 볼 때 아직까지 공개된 곡들로는 전 앨범 ‘Emails I can’t send FWD(SD)’의 담습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렇지만 최근 팝 음악 사이에서 유행하는 공간감 있는 사운드를 지향하는 앰비언트 장르를 섞어서 들고 왔다는 점에서 뻔하지만은 않다. 더욱이 앰비언트 장르가 Sabrina Carpenter의 음색과 잘 어울리며 이 조합으로 이미 ‘ESPRESSO’라는 흥행에 성공했기에 ‘Please Please Please’의 향후 성적과 앞으로 나올 본 앨범까지 충분히 기대해 볼 만하다. 어쩌면 그녀가 2024 앰비언트 유행의 승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 '등구', '벤느'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