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 SSERAFIM (르세라핌) - [CRAZY]
르세라핌은 아이즈원 출신의 ‘사쿠라-김채원’이라는 스타 플레이어와 ‘하이브 첫 걸그룹’이라는 수식어로 데뷔 전부터 대중을 기대케 했다. 신경을 많이 기울였다는 게 느껴지는 애너그램 로고, 방시혁의 총괄 프로듀싱, 성공하겠다는 욕망을 여과 없이 드러낸 군무의 패기는 그들의 성공을 빠르게 앞당겼다.
‘ANTIFRAGILE’의 대중적인 성공 이후, 그들은 뉴진스, 아이브, 에스파와 함께 이른바 ‘뉴-아-에-르’라고 불리는 4세대 걸그룹의 대표주자로 꼽히며 큰 성장세를 보였다. 이후의 ‘UNFORGIVEN’이나 ’EASY’ 또한 음악의 호불호는 있었지만 음악방송 1위는 물론 음반 판매량이 100만장을 훌쩍 넘기는 등 모두 좋은 성적을 기록했고, 잠실실내체육관 크기의 공연장에서 콘서트를 개최할 만큼 안정적인 팬덤을 구축했다. 하지만 지금의 르세라핌은 데뷔 이래 가장 불안한 타이밍에 직면했고, 중요한 판단의 기로에 놓였다.
우선, 음악 자체에 대한 의구심이 문제였다. 데뷔 초부터 지적되어온 과도한 레퍼런스 활용이 최근 작품인 [EASY]에서는 도가 지나쳤다는 것이다. ‘ANTIFRAGILE’에서도 유사한 지적이 있었지만 일종의 프로듀싱 편법이라고 눈 감아주었던 것에 비해, 인트로 ‘Good Bones’나 타이틀곡 ‘EASY’, 커플링곡이었던 ‘SMART’ 등은 그 정도가 심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반복되는 지적이었고, 음악과 프로듀싱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는 일이기 때문에 다른 돌파구를 반드시 찾아야만 했다.
아티스트 내부적으로는 역량, 특히 ‘가창’ 부분에서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멤버들은 'UNFORGIVEN'과 'EASY'의 음악방송 1위 앵콜 무대에서 몇 차례 불안한 라이브를 보였고, 무대를 본 대중들은 멤버들의 흔들리는 음정과 불안정한 가창에 비판을 쏟아냈다. 이 비판에 더욱 불을 붙인 건 올해 4월 열렸던 미국 페스티벌 ‘코첼라’ 무대였다. 데뷔 1년 반 만에 코첼라 무대에 오르며 케이팝 아티스트 중 최단기간 내 코첼라 단독 공연에 올랐지만, 여전히 불안한 라이브와 어색한 무대 매너가 이들의 발목을 잡았다. 곡의 음역이나 난이도에 따라 라이브 실력의 기복이 존재할 수는 있지만, 이렇게 지속적으로 가창에 대한 지적이 일어나는 것은 르세라핌 측에서도 쉬이 넘길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민희진-하이브 간의 ADOR 경영권 분쟁은 수많은 얘기를 촉발시키며 이미지 타격을 피할 수 없었다. 특히 르세라핌의 소속사인 쏘스뮤직과 뉴진스 사이의 관계, 르세라핌과 뉴진스의 데뷔 시기를 두고 벌인 언쟁 등이 공개되며 대중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현재까지도 해당 이슈가 장기적으로 이어질 정도로 워낙 뜨거운 감자였던 만큼 일각의 시선은 매우 날카로웠다. 많은 사람들이 도끼눈을 뜨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의 컴백이란 그 부담감이 상당했을 터이다.
계속된 부정 이슈 속에서 새 미니앨범을 발매했다. 과거의 과오, 현재의 불안함, 미래의 불확실함을 모두 잊고 일단 모든 걸 던지고 미쳐보자는 메시지를 담았다. 짜릿한 번개를 메인 이미지로 앞세워 과감한 메시지를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르세라핌은 서사를 중요시하는 팀인 만큼 음악을 통해 멤버들의 자아와 시각, 경험, 가치관 등을 투영해왔다. ‘The World Is My Oyster’, ‘The Hydra’, ‘Burn The Bridge’, ‘Good Bones’ 등의 1번 트랙(인트로)에서는 강한 다짐과 포부를 표현해왔는데, 이번 앨범의 ‘Chasing Lightning’에서도 ‘끝이 어떻게 될지 몰라도 지금의 감정에 집중해서 현재의 순간을 바꿔보자’고 이야기하며 앞서 언급했던 불안한 상황들을 온전히 ‘자신’과 ‘현재’에 몰두해 타개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다른 곡들의 가사에선 멤버들이 실제로 겪은 일들이 반영되어 있었다. ‘FEARLESS’에서는 허윤진이 <프로듀스 48>에 참가했을 때 메인보컬 파트를 욕심 내 설왕설래가 있었던 일을 간접적으로 언급했고 (욕심을 숨기란 네 말들은 이상해), ‘ANTIFRAGILE’에서는 카즈하와 사쿠라의 데뷔 이전 경력을 짚었으며 (잊지 마 내가 두고 온 toe shoes, 무시 마 내가 걸어온 커리어), ‘Swan Song’에서는 서사 부여에 반감을 갖는 대중들을 의식한 바 있다. (서사 그만 좀 쓰라고 또 날 조리돌릴 테니) 그래서 이번 앨범에도 라이브 실력 논란이나 코첼라 퍼포먼스에 대한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했지만, 사안이 무겁기도 하고 역효과라고 판단한 것인지 직접적인 언급은 피한 모양새다.
이번 앨범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타이틀곡 ‘CRAZY’가 명확하게 장르적으로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EDM과 보깅이라는, 음악과 춤 두 가지의 영역에서 모두 생소한 장르를 택했다. 두 장르 모두 케이팝 (특히 타이틀곡)에서 잘 택하지 않는 장르인데 이 중요한 타이밍에 고른 음악치고는 매우 과감한 선택이다. 곡의 구성 역시 ‘가요’가 아닌 하우스라는 ‘장르’에 집중해 그 생소함이 더욱 직접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매력적인 사운드에 비해 멤버들의 부족한 소화력이 유감스럽다. 꾸준히 지적받아 온 보컬과 랩 퍼포먼스는 아직 발전이 절실해 보인다. 발성과 표현력이 약하다 보니(특히 1번 트랙), 개개인의 솔로 파트에 돌입할 때마다 몰입감이 무너진다. 르세라핌의 최강점이었던 군무에서도 아쉬운 점이 포착되는데, 실제 보깅 동작이 차용되기는 했으나 사실상 맛보기에 그쳐버려 눈을 사로잡는 부분이 많지 않다. 바이럴이나 라이브를 위해 안무의 난이도를 하향 조정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보깅의 콘셉트가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고 사이사이 끊어져있어 흐름이 어색한 부분이 있다.
‘CRAZY’가 타이틀곡으로서 낯설긴 하나, 수록곡이나 앨범의 진행은 이전의 미니앨범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르세라핌의 기존 음악들을 들어왔다면 충분히 즐길만하다. 굵직한 사운드 위로 3개국어가 뒤섞인 내레이션이 흐르는 ‘Chasing Lightning’이나 ‘No-Return’과 ‘No Celestial’이 떠오르는 록 스타일의 ‘1-800-hot-n-fun’ 등은 익숙한 구성이다. 다만 ‘UNFORGIVEN’에서의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나, ‘EASY’에서의 ‘SMART’처럼 대중적으로 소구 될 수 있는 트랙이 부재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1-800-hot-n-fun’은 퍼포먼스를 보여주기에 그리 적합한 곡이 아니며, ‘Pierrot’는 부족한 가사 전달력과 어수선한 곡 구성으로 대중적인 접근성이 부족하다.
이번 [CRAZY]는 정면 돌파보다는 약간의 변화구를 준 듯한 느낌이다. 그게 패착이라고 느껴질 만한 결과물은 아니지만, 분명 더 좋은 선택지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르세라핌의 가장 큰 경쟁력은 ‘ANTIFRAGILE’에서 보여준 유례없던 칼군무와 ‘EASY’에서 모두를 놀라게 한 안무 난이도에 있다. 지난할 것으로 예상되는 안무의 연습량과 난이도는 유지되고, 보컬 퍼포먼스의 발전이 이루어진다면 분명 르세라핌이라는 아티스트의 영역이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물론, 멤버들의 선택이 아닌 회사의 프로듀싱일 테지만, 르세라핌은 이른바 ‘서사’라고 하는 것을 대중에게 끊임없이 어필해왔다. 개인적으로 그 서사 주입이 ‘라이브 실력 논란’에 있어선 더더욱 화근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어떤 영역에서든 자신의 내세움보다는 타인의 좋은 평가에 더 마음이 가는 법이니··· 자연스러움의 미학이 필요할 때가 아닐까 싶다. 불안하고, 어렵고, 혼란스러울 현 상황을 멤버들이 현명하게 잘 헤쳐나가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