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dle, 엔하이픈, 홍다빈, Little Simz 외
JEN : 타이틀곡 ‘Good Thing’은 요즘의 유행하는 드롭보다는 포스트 코러스까지 밀어붙이는 푸쉬형 훅송에 가깝다. 자극적인 00년대 레트로 스타일로의 회귀 시도는 과감했지만, 익숙한 방식을 차용했을 뿐 그 안에 새로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또한 후렴에서는 아이들의 대표 히트곡 중 하나인 ‘TOMBOY’가 연상되었다. 8-bit 사운드와 강한 오토튠이 얹힌 보컬은 2세대 걸그룹(2NE1, 포미닛 등)의 향수를 자극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이들만의 강점이었던 멤버 간 개성을 덮어버리며 보컬의 평준화를 초래했다. 자극적 일렉트로닉 비트 위 굵직한 메시지 없이 얹힌 단선적인 가사는 다소 공허하게 들렸고, 소연의 존재감이 크게 부각되면서 곡은 결과적으로 단편적인 인상을 남긴다.
오히려 수록곡에서는 각기 다른 음악적 시도가 돋보인다. 이번 앨범에서는 데뷔 이래 처음으로 멤버 전원이 작사 및 작곡에 참여했으며, 그 결과 트랙마다 멤버들이 지닌 음악적 감각이 느껴진다. ‘Unstoppable’은 미디움 템포의 서정적인 R&B 트랙으로, 재지한 분위기와 그루브가 매력적이다. 곡 전반에 걸친 다양한 코드 진행과 넓은 음역대는 멤버 '미연'의 작곡 감각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민니가 참여한 ‘Chain’은 서늘하고 몽환적 사운드를 바탕으로, 민니 특유의 흡입력 있는 보컬이 곡의 분위기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간다. 이처럼 각기 다른 개성이 트랙마다 살아 있다는 점은 흥미롭지만, 동시에 앨범 전체의 조화와 흐름을 방해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그래도 돼요’가 그렇다. 이 곡은 슈화가 작사에 참여하며 진정성을 담았지만, 전형적인 발라드 구성안에서 가사의 리듬감이 다소 어색하고 흐름을 분산시킨다. 멤버들의 보컬 표현력 또한 감정의 깊이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해, 곡이 가진 서정성이 끝내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기존 팀명 (G)I-DLE에서 'G'를 뗀 리브랜딩은 새로운 방향을 암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물은 여전히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클락션(Klaxon)’, ‘퀸카(Queencard)’처럼 캐치한 후렴 위 단선적인 가사를 얹는 1차원적 후킹 전략이 이번 타이틀곡에서 반복되며, 변화보다는 익숙함에 머문 인상을 남겼듯이 말이다. 데뷔 때부터 이어져 온 앨범 'I' 시리즈에서 'We'로의 전환 역시 결과적으로 팀(We)의 아이덴티티보다는 멤버 개별성이 부각돼버렸다. 각자의 트랙 참여는 돋보였지만, 앨범 전체를 하나로 묶는 방향성은 부족했던 것이다. 결국 이번 앨범은 리브랜딩의 가능성을 내비쳤지만, 동시에 현재의 한계를 드러낸 결과로 남은 채 마무리된다.
르망 : 이제 특정 세계관을 만들어 컨셉으로 사용하는 것은 K-pop 아이돌에게 흔한 일이다. 하지만, 가끔 세계관에 잡아먹혀 음악의 중요도가 떨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 엔하이픈 ep [DESIRE : UNLEASH]의 타이틀곡 ‘Bad Desire’가 딱 그런 꼴이다. 섹시한 다크 로맨스 컨셉에 적합한 곡은 맞지만, 노래 자체가 너무 올드하고 진부하다. 묘하게 슈퍼주니어 같은 2세대 남자 아이돌 음악이 떠오르는데, 이는 단순한 송폼과 앳된 드럼 소스, 바탕에 깔리는 일정한 박자의 시퀀스 신스 등이 원인이다. 그렇다고 노래에 키치한 부분이 있어 리스너 머리에 각인되기라도 하나? 코러스 파트에 나오는 허밍 부분이 유일하게 키치함을 의도한 것 같지만, 이마저도 곡의 특징으로 대두되어 노래의 매력도를 높이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그나마 칭찬할 부분을 찾자면 ‘Bad Desire’에서 보컬 레이어링과 과한 이펙트 사용으로 '다크 로맨스'라는 세계관에 흡입력을 부여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건 MV와 함께 봤을 때 장점인 거지 음원 자체로는 어떠한 의도도 느껴지지 않는다.
타이틀곡만 심심한가? 그것도 아니다. 수록곡들도 전체적으로 심심한 건 매한가지다. ‘Flashover’나 ‘Helium’ 같은 경우는 각각 2010년대 유행한 퓨처 베이스, The Weeknd가 떠오르는 신스 웨이브 장르를 활용했으나 유행도 지나고 멜로디 부분에서 특별하게 키치한 파트가 없다. 또 ‘Outside’는 다른 아이돌 힙합 음악이랑 별 차별성 없는 트랩 음악이다. 같은 리듬이 반복되는 트랩 음악에서 사비를 한 음절만 반복하면 재미도 감동도 없다.
그나마 ‘Loose’나 ‘Too Close’는 키치한 부분이 좀 존재한다. ‘Loose’는 Robin Thickle의 ‘Blurred Lines’이 연상되는 미니멀한 리듬에 가성으로 뽑은 코러스 파트가 머리에 맴돌긴 한다. ‘Too Close’는 코러스 파트 때 안티드랍으로 힘을 한번 빼는 편곡이 키치하긴 했다. 다만, 이 두 곡마저도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면, '다크 로맨스'라는 컨셉과는 거리가 먼 음악이었다는 점이다. 그나마 나은 곡 두 곡은 컨셉에 안 맞고, 컨셉에 맞는 나머지 4곡은 지루하고 진부한 참 슬픈 상황이다. 컨셉추얼한 세계관에 어울리는 음악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쳐도 음악이 곡 자체로서 설득력을 먼저 갖추지 못한다면 그건 실패한 음악이다. K-pop이 아무리 보는 음악이라지만, 보기 좋은 떡이 되기 전에 맛있는 떡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유진 : 홍다빈이라는 이름으로 선보이는 두 번째 앨범은 조금 낯선 모습이다. 전작 [Giggles]는 과거의 분노와 회복을 두 파트로 분리해 그간의 서사를 친절히 풀어내 주었다면 이번 앨범에서는 환각적인 사운드와 파편처럼 내던지는 단어들을 따라 의미를 찾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전작의 마지막 트랙 ‘Green Juice’에서 그린 주스로 디톡스가 필요하다는 그의 가사를 힌트로 따르면, 이번 앨범은 과거에서 벗어나 실험적인 트랙들을 느끼고 그의 더욱 깊어진 자의식과 예술 철학에 집중해야 한다.
감정 표현 중심의 가사와 멜로디컬한 싱잉랩, 명료했던 훅은 사라지고 정신없는 레이지와 오토튠이 주도하는, 대중성과는 거리를 둔 비정형적인 사운드가 전면에 등장한다. 다짜고짜 'Bitch I'를 외치고 시작되는 ‘.KR’의 첫인상은 당황스럽다. 이후 잘 펼쳐진 신스 위로 던져지는 뭉개진 발음들은 뭘 말하는 건가 싶다. 하지만 그 안에서 '흙수저'나 '누룽지', '우리 다빈이' 같은 친숙한 단어들이 향락적인 사운드와 충돌하며 관념을 깨뜨린다. 그렇게 첫 트랙 ‘.KR’은 자신을 이룬 태초의 정체성과 한국적 자부심으로 시작하여 홍다빈의 자아와 예술관을 재정비했음이 느껴진다. ‘See Through’에서는 진짜가 아닌 것을 꿰뚫어 본다며 예술과 진정성에 대해서 훈수를 둔다. 이렇듯 취한 척 뭉갠 심도 있는 가사에 사운드는 점점 환각처럼 빠져들게 하는 것이 이번 앨범의 미학이다. ‘Saucer’에서 예고 없이 ‘Chemist’로 넘겨지는 부분은 앨범이 한 트랙으로만 이루어진 듯이 유기적이며, 특히나 마지막 ‘Irregular’ 속 스트링 잔향으로 점철된 사운드가 사이키델릭함의 절정을 찍는다. 난해했던 첫 감상은 점차 해체되고, 사운드에 동화되어 완전하게 몰입하게 된다.
당연히 ‘Jasmine’이나 ‘Martini Blue’ 같은 곡들을 기대하긴 했다. 하지만 나라도, 내 이름 석자를 걸어 돌아왔다면 눈치 보지 않고 시도해보고 싶었던 것들, 진정성을 담은 작업물을 내보였을 것이다. ‘See Through’에서도 우리가 만든 작품이 '진짜'냐며 물었듯, 예술 앞에 의리나 진정성이 무너지는 경험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홍다빈은 그들과 똑같아지는 것 대신 순수를 지켰다. DPR LIVE적 노래가 좋았네, 마네가 아닌 이 앨범은 진화를 택한 홍다빈의 증표다. 그래서 더 진정으로 다가온다.
르망 : 영국의 래퍼 Little Simz는 새 앨범 [Lotus]에서 '나' 본연의 모습을 찾아가는 여정을 떠났다. 그녀는 앨범 제목 '연꽃'의 '부활'과 '구원'이라는 상징성과 함께 음악도 아프리카 오리지널리티 사운드로 회귀한다. 앨범 수록곡들의 모든 트랙이 아프리카 음악에 기인한 것은 아니지만, 흑인 음악 특유의 그루브와 라이브 성 사운드를 활용해 앨범 전체적인 사운드를 한 궤로 묶었다. 이런 아프리카 사운드를 구현하기 위해 나이지리아 출신 싱어송라이터 Obongjayar, 가나 출신 싱어송라이터 Moses Sumney, 재즈 드러머 Yussef Dayes 등 흑인 음악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아티스트들과 협업했다. 특히, ‘Flood’는 포스트 펑크와 아프리카 사운드를 오묘하게 섞어 성공적으로 버무려냈다. 네오 소울, 재즈 힙합, 포스트 펑크 그리고 아프로비츠까지. 수많은 장르를 어쿠스틱한 리얼 드럼 소스와 생 악기들의 조화로 앨범 내내 통일된 사운드로 풀어낸다.
음반 감정선의 흐름도 자신의 취약한 영혼을 탐구하는 과정과 동일하게 흘러간다. 분노, 경쾌함, 구원받아 돌아온 자신감과 자신을 더 이상 어둠에 빠트리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개인이 불편한 자아 성찰을 하다 보면 느낄 수밖에 없는 보편적인 감정을 다채로운 플로우와 일정한 톤으로 풀어낸다. 그러다 보니 Litte Simz 본인의 감정 기복에 따라 트랙 간의 감정선도 요동친다. 이때 본인의 음정이나 세기가 변하는 걸 최대한 억제하고 사운드의 리듬을 쪼개거나 질감의 변화로 요동치는 감정선을 표현한다. 자칫 앨범 몰입도를 깰 수도 있는 위험한 방식이지만, 앞서 말한 통일된 사운드로 흐름을 통제하여 청자에게 자신의 감정을 생동감 있게 전달할 수 있었다.
올드스쿨 힙합 팬들에게 [Lotus]는 사이버네틱한 사운드가 지배한 지금의 힙합씬에서 굉장히 반가운 소식일 것이다. 다만, 딱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 음반의 완성도가 좋지만, 너무 ‘컨셔스’하다는 것이다. Little Simz는 지난 [GREY Area]등으로 예술성을 인정받은 신예였기에, 한두 곡 정도는 상업적으로도 터져야 했다. 최소한 ‘Venom’만큼의 성공을 거둘만한 뱅어가 없다는 게 [Lotus]라는 음반에 약간의 지루함을 부여한다. 물론 이 지루함이 음반의 완성도를 망가트리진 않을 정도이긴 하지만, 대중들의 니즈를 좀 더 챙겨줬으면 정말 좋은 음반이 되었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유진 : 숱하게 양산된 하이틴 영화들 속에서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웰메이드 하이틴 영화 'Mean Girls'가 있듯이, Pebbles&TamTam의 음악도 하이틴 소녀들을 겨냥한 컨셉으로 틱톡에 바이럴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저 십대들이 듣는 유치한 음악으로 치부되기에는 아쉽다. 'Sleepover'라는 이미지처럼, 틴에이저만의 은밀하지만 발랄한 판타지를 담은 이 앨범은 2000년대 초반의 비주얼부터 가사, 사운드까지 철저히 복원하면서도 균형감을 잘 조절한 세련된 하이퍼팝으로 MZ세대를 간파했다.
샘플링된 보컬 조각들과 글리치 사운드가 난잡하게 뒤섞인 ‘PBxTMTM!’는 인트로답게 앨범의 컨셉을 응축하면서도 그룹명을 외치는 챈팅 덕에 확실히 청춘의 에너지가 전달된다. 그러나 레이지 파티 속 빠른 속도감의 하이퍼팝만 지속시키는 것이 아닌, 다이나믹을 조절한 부분들이 이 앨범의 완성도를 높인다. ‘Case Closed’나 힙합 기반의 ‘PINK LIKE SUKI’와 같이 혼돈스러운 트랙들 속에서 꿈결처럼 사근거리는 톤의 보컬이 담긴 ‘N.E.T.R’로 마치 비밀얘기를 연상케 하는 한편, ‘PILLOW FIGHT!!!’과 같이 스크리밍 보컬을 통해 클라이막스를 만들어 클럽에서 소녀들이 열광하는 모습을 연상케도 한다. 사실 트랙 배치도 배치지만, 이 듀오 자체가 서로 부족한 부분을 메꿔 발란스를 조절한 것이 묘미다. 격양된 훅에서 TamTam의 높은 피치의 보컬이 지속되면 다음 벌스에서 Pebbles가 무게감을 주는 랩핑으로 반전감을 주는 등 과잉된 사운드 안에서도 발란스를 보여주며 결과적으로 세련된 인상을 남긴다.
본래 하이퍼팝의 목적은 '최고로 재밌고 후킹하게' 이기에 자극적인 사운드로 인해 쉽게 피로한 데다가 한시적 유행으로 휘발될 수 있어 지속성이 우려되기도 한다. 특히나 소녀들의 로망을 담은 Y2K컨셉까지 재현한 이 앨범은 자칫하면 그저 피상적인 소비로만 흐를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하이퍼팝을 넘어서 힙합, 클럽음악의 경계까지 넘나들며 유희적인 사운드를 다각적이고 균형감 있게 보여줌과 동시에 MZ소녀들의 마음을 저격했다. 소년들에게는 모르겠지만, 학교 앞 팬시점 문을 열 듯, Pebbles와 TamTam 이 단짝 둘의 합이 MZ소녀들을 설레이게 하는 앨범을 만들었음에는 분명하다.
JEN : 독보적인 분위기와 사운드를 통해 일명 '글리치 퀸'으로 주목받은 yeule은 이번 정규 앨범 [Evangelic Girl is a Gun]을 통해 전작의 얼터너티브한 질감은 유지하면서도, 보다 대중적인 록, 트립합 사운드를 앨범 전반에 녹여내며 음악적 스펙트럼의 확장을 시도한다. 이러한 사운드적 전환은 단지 대중성과의 접점을 넓히기 위한 시도에 그치지 않는다. 앨범이 다루고자 하는 중심 메시지 'Evangelic Girl(성스러운 여성)'과 'Gun(폭력성)'이라는 상반된 개념이 충돌하는 복합적인 정서를 보다 잘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
이러한 메시지와 사운드의 유기적인 결합은 다수의 트랙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트립합 특유의 몽환적인 질감을 통해 겉보기에는 신비롭지만, 실상은 공허한 분위기를 그려낸 ‘Tequila Coma’와 ‘The Girl Who Sold Her Face’가 대표적이다. 반면 ‘1967’과 ‘VV’는 거친 록 사운드로 폭력적인 감정을 역동적으로 표출해 냈다. 특히 ‘1967’에서는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를 쌓아가며 점진적으로 고조되는 록의 텐션을 구성하고, 매력적인 기타 라인이 돋보이는 아웃트로까지 더해지며 여러모로 흥미롭고 반항적인 에너지가 돋보인다. 앨범명과 동명의 곡 ‘Evangelic Girl is a Gun’은 긴장감이 느껴지는 보컬 디렉팅, 속도감 있는 전개와 후반부 몰아치는 파트를 통해 감정의 극단에서 폭발하는 순간을 그려내며 앨범의 메시지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록 장르가 가진 뚜렷한 기승전결이나 분명한 멜로디 역시 감정의 흐름을 더욱 직관적으로 보여주며 표현력을 강화했다. 마치 한 발의 총성이 울리기 직전, 모든 감정이 응축되어 터져 나오는 듯한 이 트랙은 앨범 전체를 조준하는 중심축이다.
그렇다고 해서 yeule이 택한 대중성은 단순히 장르의 표피적 전환에 그친 것은 아니다. ‘Dudu’에서 드러난 매끄러워진 곡의 구성, 자연스러워진 리듬의 탑라인 역시 대중적인 감각을 보여주는 또 다른 단서로 작용한다. [Evangelic Girl is a Girl]은 분명 실험성을 줄였고, 더 많은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문을 열었다. 그 과정에서 뒤틀리던 사운드의 질감은 비교적 덜어졌으며, 대신 선형적인 사운드가 전반적으로 배치됐다. 하지만 넓어진 스펙트럼 안에서도 여전히 자신만의 고유한 색채를 놓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단언컨대 그가 그려나갈 다음 페이지는 더 많은 사람들의 귀추가 주목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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