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릿(ILLIT) – [bomb]
“고도로 발전된 뇌절은 예술과 구분할 수 없다"
과감하게 독특해진 아일릿의 새로운 시도
아일릿(ILLIT) - [bomb]
아일릿과 비교하지 않고서는 최근 데뷔한 그룹들의 활동에 관해 얘기하기 어렵다. 화제성과 인지도 측면에서 부각되는 것도 그렇고, “아일릿 느낌”이 5세대 걸그룹의 폼팩터처럼 트렌드 혹은 기준선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일릿의 스타일이 자리 잡기까지 여러 부침이 있었다는 걸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데뷔 앨범부터 논란이 된 뉴진스와의 콘셉트 유사성 때문이다. 워낙 해당 사건 자체의 규모와 파장이 컸다 보니, ‘Magnetic’의 성공에도 “짭진스”소리를 들으며 마냥 기뻐할 수 없었던 아일릿이었다. 이때부터 아일릿과 유사성의 지독한 인연이 시작된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카피캣이라는 인식이 아예 사라졌다고는 할 수는 없겠지만, 아일릿은 고유한 영역을 구축해 낸 듯하다. 아케이드 풍의 신스 사운드와 이에 걸맞은 경쾌한 비트 구성. 반복적이고 통통 튀는 코러스 가사. 빠르고 귀여운 안무와 이에 맞는 인형 옷 같은 코디로 만들어가는 발랄하고 러블리한 하이틴 콘셉트. 천진난만함을 과장되게 표현하기 위한 표정 연기, 순진하고 맑을 것 같은 색감. 대중들 또한 여리여리한 화이트톤의 코디라든가, 특유의 코러스 멜로디에서의 샘플링 등의 요소를 통해 “아일릿 깔”을 인식하고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일릿은 현 트렌드인 “하이틴 걸리쉬 무드”의 성공적인 모델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곳저곳에서 “아일릿 같은데?”라는 생각이 드는 곡과 콘셉트가 보이게 되었다. 교복이야 원래도 K팝에서 자주 쓰이던 전통적인 요소라 해도, 소녀를 비주얼로 풀어 나가는 방법도 많은 그룹이 사랑스럽고 하늘하늘한 느낌으로 그려 나가고 있으며, 샘플 춉으로 코러스를 구성하는 것까지. 언급하지 않아도 이미 상반기에 우리는 이러한 활동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으며, 음원 사이트 등에서 타 아티스트에게 아일릿과의 유사성을 언급한 반응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그 결과, 아일릿 스타일의 사진이라고 모아둔 이미지를 다시 보면 오히려 타 그룹들도 보이는 기시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카피캣 소리를 듣던 아일릿의 카피캣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유사성”이라는 키워드가 달갑지 않은 아일릿 입장에서는 억울할 노릇이다. 기껏 아일릿만의 고유한 이미지를 그려 놨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만의 이미지가 아니게 되었으니 말이다. 변화하지 않고 가만히만 있으면 자신의 자리를 유지할 수 없다는 “붉은 여왕 가설”은 아일릿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가 되었다. 지긋지긋한 유사성과의 작별을 고하기 위해서는 기껏 자리 잡은 터전에서 또다시 그들만의 자리를 찾아 떠나야 하는 아일릿이다.
“아일릿스러움”의 핵심 감상은 결국에는 사랑스러움일 것이다. 과장되더라도 천진난만함을 나타내고자 한 표정 연기라든가 하는 요소들로 결국에는 대중들에게 무해한 존재로 어필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리 이번에 아일릿이 변화를 도모할 것이라 예상을 했더라도 티저 영상부터 이어진 기괴하면서도 개성 있는 비주얼 콘셉트는 당혹스러웠다. 대놓고 느껴지는 CG처리에서 B급 감성이 연상되는 타이틀 스니펫 영상은 그래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범주 안에 있었지만, 브랜드 필름에서의 벽에 “토마스”처럼 얼굴만 박아둔 이 연출의 강한 인상에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이전처럼 무해한 동심과는 거리가 먼, 낯설고 편안하지만은 않은 콘셉트였다.
갑자기 마법 소녀가 되며 승천하며 끝난 범상치 않은 브랜드 필름이 그러하듯, 본판 역시도 정신없이 당혹스럽다. 전 곡을 처음 들으며 들었던 감상은 “스페드업(Sped Up) 버전인가?”였다. 5곡에 13분이라는 러닝타임이 요즘 치고는 그렇게 짧은 것은 아니지만, 워낙 빠른 드럼 비트에 얹어진 현란한 신스 라인, 거기에 휘몰아치듯 등장하는 캐치한 요소들까지 듣는 내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뮤직비디오 또한 마찬가지다. 특유의 과장된 표정을 이번에는 코믹하게 풀어내며 시작한 이번 뮤직비디오의 전개는 마치 개꿈을 꾸는 듯하다. 거인이 된 원희, 발랄하게 자전거를 타다 날아가 초원에 파묻힌 멤버들, 그러고서는 갑자기 현대적인 장면으로의 전환까지. 하나하나 나열하기엔 너무 많은 요소가 당혹스럽게 이어진다.
그 정점에 서 있는 것이 ‘빌려온 고양이’라는 도대체 어디서 등장한 감성인지도 종잡을 수 없는 제목의 타이틀 곡이다. LP를 빠르게 돌린 듯 필터된 샘플링이 반복되는데, 딱 이 질감이 Sped Up 리믹스의 그 질감이다. 게다가 듣는 순간 Night Tempo가 떠오르는 퓨처 펑크 스타일이 사실 타이틀 곡에 채용할 정도로 마이너하고 친숙하지만은 않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뜩이나 낯선 이 장르의 단순 음악적 느낌뿐만 아니라, 퓨처 펑크 플레이리스트를 검색하면 나오는 아니메 스타일의 썸네일이 주는 감상까지도 뮤직비디오와 가사에 녹여낼 줄은 몰랐다. 레트로 하다면 레트로한 네온 톤의 이미지가 주는 화려한 발랄함이 그 정신없는 뮤직비디오의 전개와도 일치했으며, 곡의 후킹 포인트가 된 화제의 그 가사 “꿍실냐옹”이 당황스러운 발랄함을 완성했다.
‘Almond Chocolate’서부터 모카와 이로하라는 일본 멤버를 앞세워 아예 오리지널한 일본 무드를 가져가고자 하는 접근은 볼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과감하게 서브컬쳐를 가져올 줄은 몰랐다. 모든 요소에서 아예 과감하게 독특함을 가미한 결과, 전반적으로 이번 앨범은 이해할 수 없는 혼란스러움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꽂힌다. 어쩌면 작금의 K팝이 듣는 평가이자, ‘Magnetic’과 ‘Cherish’가 만든 아일릿의 특징인 “챌린지용 노래”에서 한술 더 떠 도파민 터지는 “틱톡 감성”을 오히려 제대로 활용한 게 아닐까? 호평이든 혹평이든 그룹의 정체성을 더욱 뚜렷하게 활용하여, “틱톡”이 주는 부정적인 뉘앙스 안에 한정하기 아쉬울 정도로 본격적으로 칼을 갈고 낸 앨범임이라는 생각이 든다. 프로모션과 뮤직비디오를 가리지 않는 기괴한 영상 연출, 빠르고 화려한 전개, 그리고 종잡을 수 없이 독특한 어감의 단어들, 그리고 일본과 서브컬쳐라는 문화가 주는 마이너한 인터넷 감성. 이 모든 당혹스럽고 강렬한 요소들을 날카롭게 깎아서 아일릿의 트렌디한 아이덴티티를 깊게 관통했다.
도파민 폭풍을 잠시 걷어내고 침착해지면, 사실 “다시 또 달라져야 한다”라는 조급함이 느껴진다. 감히 함부로 범접할 수 없게 하려다 보니 너무 욕심을 부린 듯, 잡다한 요소들이 너무 맥시멀하게 들어 있다. 아이덴티티를 위해 코러스에서 또다시 등장하는 보컬 춉이라든가 하는 요소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올 때 “조금은 과하지 않나” 하는 부담스러움이 느껴지며 아일릿의 욕심의 아쉬움으로 남았다. 자극적이고자 한 의도가 너무 적나라했다.
그렇다고 “혼란스럽다”, “자극적이다”라는 단어로 과했다고 여기기엔 자극 속에 숨어 발견하기 어려운 디테일들이 아쉬워지는 앨범이다. 트랙 배치를 살펴보면 타이틀 곡과 이어 등장하는 ‘jellyous’가 워낙에 개성이 세서 그렇지, 생각보다 이어지는 ‘oops!’는 차분하게 Teen한 무드를 그려내며 앨범의 완급을 조절하고, 뮤직비디오의 충격에 숨은 ‘little monster’는 영상을 배제하고 팬 미팅 선공개 무대를 보면 몽환적인 앨범의 무드를 잘 담아낸 서늘한 매력이 있는 곡이다. 때론 90년대 잡지식 연출을, 또 때로는 흑백으로 서스펜스가 느껴지는 보호 시크를 담은 다양한 콘셉트 포토 또한 메인 무드의 자극을 뚫고 뒤져볼수록 다양한 재미를 선사하는 요소이다. 나름 무난한 음악방송 무대의상을 통해 대중적으로 공개되는 부분에서 감도를 조절하기도 했다. ‘빌려온 고양이’라는 표현 역시 뜬금없어 보이지만, 가사를 뜯어보면 슈팅 스타처럼 통통 튀지만 귀여운 사랑 고백과 이 곡의 무드를 함축적으로 비유한 기가 막히게 적절한 시적 표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느덧 데뷔한 지 1년 반이 된 아일릿이 유사성이라는 오래된 꼬리표와 작별을 하기 위해 “억울하면 너네가 더 튀던가”를 진짜 한 레벨 더 과감하게 해 버렸다. 덕분에 이제는 어디랑 비슷하단 말을 듣기에는 좀 억울할 것 같다. 사실 이 자제하지 않은 독특함엔 되게 어려운 설계가 들어있는데, 기존의 이미지에서 출발해서 아예 새로운 변화를 만든다는 것은 모든 기획자에게 난제일 것이다. 이 난제를 극복했다는 점에서 조금은 과해 보이는 아일릿의 이번 앨범은 예술과도 같다고 얘기하고 싶다.
by. 플린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