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경, 공원, 실리카겔 외
광글 : "모든 곡들이 하나같이 제 마음에 들어서, 어느 하나를 꼭 첫 번째로 고를 수 없었다"는 그의 고백은 허세가 아니었다. 실제로 이 앨범은 섣불리 킬링 파트 하나로 승부를 걸기보다 전체를 '통으로' 들었을 때 매력은 배가 된다. 신스 사운드 아래 심플하게 흘러가는 기본 틀 위에서, 각 트랙마다 글리치한 사운드와 펑키한 기타, 아프로비츠 리듬이 번갈아 등장한다. 가경의 목소리는 이러한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카멜레온처럼 색깔을 바꾼다. 적당히 몸을 흔들게 만드는 에너지는 일정하게 유지하면서도, 지루함은 철저히 차단하는 센스가 인상적이다. 가경의 바람처럼 어느샌가 한 번 듣고 나면 두 번, 세 번 다시 반복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좋은 음악이란 게 뭐 별건가, 자꾸 듣고 싶으면 되는 거지.
베실베실 : (마치 authentic의 한로로처럼) 아카이브 아침이 1년간 공들여 키운 연습생 공원의 데뷔 EP [01]는 그 유명한 파란노을까지 섭외하며 한국에서 흔치 않은 '여자 슈게이즈'를 포지셔닝 한 듯 보이지만 성적표는 절대로 그들의 기대치를 충족하진 못했을 것이다. 음악 자체가 아쉬운 것은 아니지만, 파란노을의 사운드를 기대하며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너무 슴슴해 보였고, 기존 아카이브 아침의 인디 감성을 원했던 사람들에게는 너무 강하게 들렸을 수도 있겠다 싶다. 검색하기 어려운 이름부터 시작해 마케팅, 홍보의 부족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이번 싱글 ‘서울’은 한결 힘을 뺐다는 사실이다. 특히나 기존 파란노을이 참여했던 ‘윤슬’의 뒷부분의 터지는 부분이라거나, ‘불꽃놀이’와 ‘문’의 슈게이즈 사운드와 비교하면 더더욱 그렇다. 편안하고 익숙한 기타와 업 템포 리듬 속에 캐치한 탑 라인이 버무려져 이전의 곡들보다 확실히 타겟층이 설정됐다는 것이 느껴진다. 누가 들어도 페스티벌에서 소위 '머글'들과 뛰기 좋은 곡 아닌가? 그러면서도 간주에선 슈게이즈 사운드를 유지하여 기존의 정체성도 버리지 않았으니, 작곡가 데일로그의 역량이 돋보인다. 슈게이즈라는 장르와 대중성 두 마리 토끼를 나름 모두 훌륭하게 잡아낸 것이다.
'연습생 출신 인디 가수'라는, 한국에만 존재하는 이 독특한 생태계에 발을 내디딘 아카이브 아침은 과연 또 하나의 성공 사례를 남길 수 있을 것인가? 확실한 건, 기존의 뻔하디 뻔한 양산형 인디 가수들보다는 듣는 맛이 있다는 것. ‘서울’을 통해 만약 이 아티스트가 성공하지 못한다 해도 적어도 그것이 음악의 문제는 아님은 증명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음악 외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더 해볼 시점이겠다.
루영 : 히트곡 ‘NO PAIN’이 포함된 전작 [Power Andre 99]의 대중적인 성공으로 실리카겔은 대중에게 '파워풀한 쇠맛 밴드'로 각인된 듯 보였다. 그러나 올해 7월에 발매된 새 싱글 ‘南宮FEFERE’는 보사노바 리듬을 활용한 어쿠스틱 기타 연주로 전작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부드럽고 서정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신디사이저 사운드로 사이키델릭함은 유지하고 있지만, 이전보다는 파워풀한 에너지를 내려놓음으로써 리스너들에게 전작과 다른 인상을 주고 있는 건 확실하다.
Japanese Breakfast의 피처링 참여도 인상적이다. 도입부에서 보컬로 서정적이고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작사, 작곡에도 참여하여 자신만의 색깔을 더했다. 특히 중반부에서 하프시코드 사운드가 빠르게 반복되는 구간에서는 그가 최근에 발매한 정규 4집 [For Melancholy Brunettes (& sad women)]의 고전적인 느낌이 연상되었다. 그 밖에도 사이키델릭함을 기반으로 다양한 장르를 융합한 곡들이 공통적으로 각자의 커리어에 있다는 점도 두 아티스트의 협업이 더욱 흥미롭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이번 싱글은 1집 [실리카겔]의 서정적인 사운드와 2집 [Power Andre 99]의 팝적인 문법이 절묘하게 시너지를 낸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잔잔한 기타 연주가 이어지다가 후렴 부분에서 터져 나오는 글리치한 신디사이저 사운드는 ‘9’, ‘Sister’ 등의 1집 수록곡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실험적이고 난해하게 느껴지는 요소보다는 대중적인 팝의 기승전결을 충실히 따르고 있어서 귀에 크게 부담이 가지도 않는다. 신인 시절의 곡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팬들도, ‘NO PAIN’ 이후로 새로 유입된 리스너도 모두 만족할 만한 곡이다. 2집의 성공에만 머무르지도, 1집의 스타일로 완전히 회귀하지도 않은, 또 다른 새로운 물결(bossa nova)을 선언하는 그들의 다음 행보가 어떨지 궁금해진다.
베실베실 : 내가 만약 The Alchemist의 비트를 많이 듣지 않았다면, [Alfredo]를, [The Skeleton Key]를, [The Genuine Articulate]를, [Bo Jackson]을 듣지 않았다면 이 앨범을 조금이라도 더 좋게 들을 수 있었을까? 특유의 소울풀한 샘플링으로 누와르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하며 언더그라운드 붐뱁을 대표하는 1타 프로듀서로 자리매김한 The Alchemist이지만, 그간 너무나도 다작해 온 것이 독이 됐는지 이제는 그 작법이 일종의 템플릿처럼 들리는 듯하다. 본 앨범 역시 The Alchemist의 비트와 Freddie Gibbs의 랩 모두 정말로 흠을 잡을 데가 없이 뛰어나지만 2020년에 발매된 [Alfredo]와 섞어 놓아도 구분할 자신이 없다. 물론 본 작이 조금 더 차분해지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앨범의 새로운 지점이라고 말할 정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진짜 문제는 The Alchemist뿐 아니라 해당 장르를 대표하는 레이블 Griselda의 랩퍼들. Conway the Machine이나 Benny the Butcher, Westside Gunn까지 일제히 "슬슬 식상하다"는 피드백을 듣고 있는 상황. 아직까지는 음악이 템플릿이고 뭐고를 떠나 순수하게 듣기 좋기 때문에 수명을 연장해 나가고는 있지만, 이들의 폼이 조금이라도 떨어진다면 이 장르의 미래는 아무래도 긍정하기 어려울 것 같다. 새로운 무엇인가가 필요한 상황이다.
광글 : BTS, 블랙핑크 그리고 K팝스타는 누구인가? 대부분의 아이돌은 이 세 번째 왕좌를 거머쥐기 위해 'K'를 떼는 보기를 선택했다. 트렌디한 사운드에 집중한 이지리스닝으로 접근하는 아일릿과 캣츠아이 같은 그룹이 대표적인 예시다. 하지만 이 음악은 'k'를 다시 붙이는 것은 물론 대문자 'K'처럼 더욱 강화하는 정반대의 선택을 한다. 과거 K팝의 전형성을 드라마 성격의 스토리와 결합시켜 새로움을 만들어낸 참신한 발상이 바로 그것이다.
음악적 전략은 분명하다. 누가 들어도 따라 부를 수 있는 후크송의 기조 아래,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추임새와 간주 이후 등장하는 랩 파트, 고조되는 브릿지까지. 전통적인 K팝 문법을 충실히 따른다. 이러한 K팝 문법은 히어로물 특유의 에너지와 딱 맞는 감성을 제시하는 것은 물론, 뮤지컬의 기승전결과 다이내믹한 플롯이 정확히 일치하며 희열을 느끼게 만들었다. 기존의 맥시멀한 사운드가 피로감을 주었던 것과 달리 오히려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더욱 기대하게 만드는 장치로 활용한 재치도 눈에 띈다.
라틴과 아프로비츠가 하위 컬쳐로써 살아남은 가장 큰 이유는 음악 자체에 문화가 함께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시 'K'를 붙임으로써 콘텐츠와 함께 문화적 정체성을 어필한 지점이 가장 혁신적이었다. 서양의 소스를 뿌리는 것뿐만 아니라 익숙한 맛도 잘 버무리면 질리지 않고 맛있을 수 있다는 걸 증명한 것 같달까? 앞으로 물리적인 거리감을 뛰어넘을 무형의 콘텐츠와 결합된 K팝의 새로운 길을 조심스레 예측해 본다.
루영 : 데뷔 싱글 ‘Chaise Longue’부터 1집 [Wet Leg]까지 대중적 성공과 평단의 높은 평가를 꽤 이른 연차에 받은 만큼, 한편으로는 '소포모어 징크스'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그들은 1집 못지않은 발칙함과 당돌함, 장난스러운 에너지를 가진 2집 [moisturizer]로 돌아왔다. 1집과 동일하게 포스트 펑크와 인디 락을 기반으로 삼고 있지만, 1집이 상대적으로 더 날 것의 사운드에 가까웠다면, 2집은 새 세션 멤버(Henry Holmes, Josh Mobaraki, Ellis Durand)의 합류로 멜로디가 다양해졌을 뿐만 아니라 사운드도 더욱 풍성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중독성 있는 펑크 리듬과 멜로디 외에도 그들이 큰 인기를 얻은 이유는 자신의 이야기를 날것 자체로 꺼내놓길 주저하지 않는 '당돌함'이라고 생각한다. 2집에서도 1집과 마찬가지로 사랑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30대 영국 여성으로서 겪는 성적 욕망(pillow talk)과 정체성, 관계 유지에 대한 고민(pond song), 일방적인 성적 대상화에 대한 반발심(catch these fists, mangetout) 등으로 확장된 경험과 생각들을 직설적이고 유머러스한 가사로 표현해 냈다. 이에 단순한 진행과 멜로디, 툭툭 던지는 창법이 더해져 Wet Leg만이 할 수 있는 특유의 발칙하고 당돌한 캐릭터를 만들어 낸다. 그야말로 꾸며내지 않은 자연스러움의 표본이 아닐까.
다만 우려되는 지점은 그들이 선보이는 음악 스타일의 유통기한이 오래 지속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Sonic Youth, Pixies, Smashing Pumpkins 등 90년대의 얼터너티브 락 아티스트들의 음악과 닮았다는 평가를 하고, 실제로 그들도 The Strokes, White Stripes 등의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 밴드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비록 지금은 좋은 평가를 받고 있긴 하지만, 선배 밴드와 유사한 음악 스타일에 계속 머무른다면 '신선한 신인' 타이틀에서 벗어난 이후의 음악은 이전과 비교해서 발전이 없다거나 진부하다는 평가를 받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후광과는 별개로, 앞으로 Wet Leg만이 선보일 수 있는 음악 스타일을 계속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게 앞으로의 과제라고 생각된다.
※ '광글', '베실베실'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