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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식한 놈들의 음악 트집잡기
(25년 8월 2주)

에이피 알케미, 키, Metro Boomin, Wisp

by 고멘트

"사상누각 확장공사"


1. 에이피 알케미 (AP ALCHEMY) - [AP Melo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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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린트 : 마지막 컴필레이션이 나온 뒤 2년 동안 기존 멤버의 연이은 이탈 등 수많은 부침과 변화의 시간을 겪어온 AP ALCHEMY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과거 스윙스 사단의 재치 있고 거친 모습을 지워내고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PB R&B 앨범으로 변주를 주었다. 노창이나 SaeWoo 등 기존의 힙합 프로듀서들이 개성 강한 트랙을 만들어왔다면, 이와 다르게 hyeminsong으로 대표되는 프로듀서진은 팝적인 감각이 좀 더 두드러진다. 이러한 변화가 DeVita나 문수진과 같은 보컬엔 당연히 잘 어울렸음은 물론, 노윤하, 율음과 같은 래퍼들 또한 곡에 맞춰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앨범에서의 대중적인 변화는 지나간 트렌드의 답습일 뿐, 몰개성이라는 말이 더 적합한 것 같다. 듣기에는 더 무난하고 나름 잘 살렸고 나쁘지 않은데, 당연히 아는 맛이고 뻔한 만큼 편안한 것이다. 그 속에 트랙의 새로움, 혹은 아티스트의 개성과 같은 와우 포인트는 없었다.


4년 전쯤 SOLE 또는 당장 이번 앨범에도 참여한 문수진의 곡과 같은 R&B 트랙들과 1년쯤 지난 리퀴드 드럼 앤 베이스와 아틀란타 베이스는 더 이상 새로움을 주지도 않고, 트렌드라는 힘을 갖고 있지도 않다. 감 떨어져 보일 뿐이다. 도트 디자인의 게임 그래픽을 통통 튀는 아틀란타 베이스 트랙에 조합한 뮤직비디오 또한 예상 가능하다. 랩과 보컬 양면에서도 전형적인 스타일 이외에 특색 있는 스타일을 정립했다 보기 어려웠고, 누구나 다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은 이런 접근이 매력적으로 다가오진 않는다. 다른 곡들에서도 뭐 하나 콕 집어 눈에 띈다는 특징을 찾기 어렵다. 그나마 마지막 곡에서 변치 않고 자리를 지킨 노창만이 만족스러웠다.


이런 무색의 앨범을 가져오기엔 AP ALCHEMY는 해야 할 숙제들이 많았다. 통폐합으로 인해 흐려진 정체성이라든가, 레이블 단위의 활동이 부족하다든가, 혹은 뉴페이스들이 많은 만큼 이들의 색을 알릴 필요도 있었다. 누가 나갔든, 운영이 어려웠든 다 떠나서 가장 큰 문제는 지금 멤버들의 가치를 보여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새로 꾸린 멤버들의 개성과 툴을 살려 요동치던 인원 변경의 의의를 설명해 줄 수라도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의의는 그저 R&B를 했을 뿐, 폐업하지 않았음을 알리는 것만 같은 스윙스의 문어발식 활동같이 임팩트 없는 앨범이었다. 여전히 돋보이지 못한 멤버들로 사상누각에 R&B라는 방 하나 더 짓는다고 그 집을 사고 싶게 만들진 못한다.





"안전제일주의는 재미를 동반할 수 없어요."


2. 키 (KEY) - [HU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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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글 : [BAD LOVE]부터 이어진 어두운 비주얼. 그리고 키 특유의 쏘는 듯한 고음, 음악을 이끄는 신스 베이스까지. 이젠 '키표 음악'의 공식처럼 느껴진다. 타이틀 ‘HUNTER’ 또한 예상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무거운 킥 드럼, 어둡고 웅장한 베이스, 그리고 날카로운 보컬이 들리는 순간, "또?"라는 반응이 자연스레 나왔다.


가장 큰 문제는 여전히 복고 사운드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만 맴돈다는 점이다. 특히 ‘HUNTER’의 신스 패드나 ‘Trap’의 몽환적인 보컬 레이어링 역시 위켄드 특유의 어둡고 관능적인 사운드 팔레트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속도감을 유지하는 뉴잭스윙 장르의 사용이나 왜곡된 보컬 이펙터를 통해서 새로움을 보여줬지만, SM 수록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안전한 하우스, 일렉트로 팝 공식으로 다시 돌아가면서 앞선 변화도 빛을 잃고 말았다. 오히려 강한 비주얼에 걸맞은 하드한 음악으로 힘을 끝까지 이어가면 어땠을까. 결국 [HUNTER]는 '키표 음악'의 연장선이지만, 동시에 더 대담한 음악적 모험이 절실함을 보여주는 앨범이다.





"아틀란타에 찾아온 지구온난화"


3. Metro Boomin - [Metro Boomin Presents: A Futuristic Summa (Hosted by DJ Spinz)]

플린트 : 정말 오랜만에 듣는 것 같은 밝고 즐거운 힙합 앨범이다. 신디사이저, 브라스, 피아노, 리코더 등의 사운드가 트랙마다 희망차게 빰빰거린다. 그 어떤 복잡한 리듬, 또는 심오한 사운드 없이 밝고 가볍다. 심오하지 않다 못해 유치하게 들리기도 한다. 즐거우면 미소를 짓고 행복해하는 모습이 먼저 떠오르는 것처럼, "즐길 수 있는" 또는 "즐거운"이란 표현이 직관적으로 그려진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심각한 무드의 트랙 위에서 수없이 들어왔던 "Metro~!"가 처음으로 신나는 추임새로 들렸다. 솔직히 24곡이라는 그 많은 트랙들이 다 이렇다 보니 집중하면서 듣고 있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 더운 여름에 이렇게 신나는 곡들이 귀에 거슬리지 않고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만한 노동요가 없었다.


어느 순간 이런 "밝음"은 힙합에 사용되지 않는 형용사가 되었다. 최근의 파티는 어둡고 연기 자욱한 공간에서 자극적인 도파민이 가득한 곳으로 그려지는 듯하다. 그러나 트랩이 무거운 무드와 레이지와 같은 공격성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놓치고 있었던 즐거움이 있었을 것이다. 2010년대에 들어서 힙합씬이 트랩으로 통일되기 전, 앨범에 참여한 Roscoe Dash, T.I. 등이 그러했듯, 미국의 남부는 그런 밝은 즐거움 또한 잘 간직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앨범에서는 트랩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전, 지금은 멀리 온 더티 사우스의 근본에 있던 미국 남부의 야외 파티가 그려졌다.


무겁고 어두운, 그래서 포스 있던 음악을 만들며, 트랩이 한층 더 어두워지는 데 큰 역할을 한 Metro Boomin이 이렇게 밝은 앨범을 가져왔다는 점이 역설적으로 보이지만, 다른 아티스트들의 최근 행보와도 결을 같이 한다고 생각해 볼 만한 것 같다. 올 초 Playboi Carti도 트렌드의 최전선에 있다가 다시 남부 트랩의 시작 지점을 조명했고, Tyler, The Creator도 그저 즐기는 데에 집중하는 앨범으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줬다. 힙합에 뭔가 새로운, 그러면서도 일차원적인 "즐거움"에 대한 갈증이 있는가 싶기도 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80점짜리 음악"


4. Wisp - [If Not Winter]

광글 : 요즘의 슈게이즈가 무엇인지 물어본다면 주저 없이 이 앨범을 추천한다. 엄청난 노이즈와 섬세하고 들릴 듯 말 듯한 가느다란 보컬을 통해 슈게이즈 장르의 DNA를 충실하게 복각했다. 여기에 팝, 뉴메탈, 드림팝, 일렉트로닉 요소를 섞어 현대적 감각을 입힌 지점은 Tik Tok 세대에게 슈게이즈를 '쉽게' 그리고 '간지나게' 어필한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이 앨범의 한계이기도 하다. 모든 트랙이 비슷한 패턴으로 반복되는 탓에 중반 이후부터는 살짝 버거운 피로감이 밀려온다. 개별 곡들은 나쁘지 않지만, 앨범 전체로 보면 스포티파이에서 추천하는 '슈게이즈 플레이리스트' 안에 있는 익명의 트랙들 같다. 각 트랙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기보단 BGM처럼 스며드는 느낌이랄까? 트랙 수를 줄이고 색깔이 확실한 몇 개의 싱글로 압축했다면 훨씬 강렬했을 것 같다. 이번 앨범은 양으로 승부하려다 질적 선명함을 놓친 케이스의 예시로 제시하고 싶다.





※ '광글'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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