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식한 놈들의 음악 트집잡기
(22년 연말결산 ③)

IVE, 실리카겔, LUCY, 베이빌론, Rina Sawayama 외

by 고멘트

"LOVE YOURSELF에서 나르시시즘까지"


1. IVE (아이브) – ‘LOVE D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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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봄 : 여전히 유효하긴 하지만 자기 자신을 사랑하자는 메시지부터 주체적인 여성상, 혹은 자존감 넘치는 이미지 등 이미 다양한 메시지와 컨셉들이 K팝을 강타했었다. 이러한 컨셉이 대중에게 슬슬 피로감을 주게 되어 외면받거나 명확한 자신감이 없이는 사용되지도 않고 있을 즈음에 크게 한 술 더 뜬 그룹이 바로 IVE 되시겠다.


첫 데뷔 싱글 ‘ELEVEN’을 통해 이미 충분히 성공적인 데뷔를 선보였던 IVE는 ‘LOVE DIVE’로 순식간에 손가락에 꼽힐 그룹으로 발돋움했다. 언급했듯이 자기애와 관련된 여러 주제들이 식상해지던 중 나르시시즘이라는 컨셉은 모 아니면 도 혹은 맞불을 지르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세련된 사운드로 점철된 음악성은 이들의 선택을 확실히 뒷받침하는 발판이자 무기가 되었으며, 대중에게 식상함과 지루함이 아닌 기대 이상의 신선함을 선보이는 모습이었다.


뉴진스라는 예상을 뛰어넘는 복병이 출몰하면서, 새 시대의 걸그룹하면 최초로 떠오르는 Top of Mind에 대한 경쟁이 치열해짐과 동시에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연스레 경쟁구도가 형성될 것으로 보인다. 2023년은 이 두 그룹이 얼마나 양질의 음원을 선보이는지, 또 어느 정도의 신선함을 대중에게 제공할 수 있을지를 주목해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되지 않을까.





"소외됐던 사람들 모두 함께 노래를 합시다"


2. 실리카겔 - ‘NO P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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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9 : 실리카겔의 음악은 늘 강렬하고 신선했다. 그렇지만 군복무 공백기 이후 작업물들은 확실히 그 이전보다 더 확장되고 나아간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감상의 가장 큰 이유는 다소 난해하고 실험적이었던 이전과 달리 대중성에 좀 더 신경 쓰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2020년 복귀 싱글 ‘Kyo181’과 2021년 ‘Desert Eagle’은 그런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2022년 싱글 ‘NO PAIN’이 발표됐다. 감히 말하건대, 실리카겔의 작업물 중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받을 만한 요소를 두루 갖추지 않았나 싶다. 탑라인 멜로디, 곡 구성, 사운드, 가사 모두 기존의 실리카겔의 캐릭터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대중과의 접점을 잘 찾았다는 인상이다.


특히 실리카겔이 기존에 발표했던 다수의 곡들과 달리, 가사가 상당히 구체적이고 직접적이라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내가 만든 집에서 모두 함께 노래를 합시다/소외됐던 사람들 모두 함께 노래를 합시다.’와 같은 가사는 이 구절을 노래하는 김한주의 보컬에 힘입어 직관적인 감동을 주기도 한다.


작년 ‘Desert Eagle’로 이미 수상을 한 실리카겔이지만 그렇다고 올해 나온 이 개쩌는 싱글을 차마 넘길 수는 없었다. 정말 신기하다. 그들은 2020년 이래 싱글 단위로만 작업물을 발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곡 한 곡이 결코 가볍지 않다. 실리카겔의 2023년이 기대된다. 좀 더 풍성한 볼륨의 앨범을 듣고 싶다.





"그리운 동심을 오롯이 담은 단편집"


3. LUCY – [Childh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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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봄 : 조금 더 자극적인 것을 찾고, 더 화려한 것을 갈구하는 것은 반복되는 일상과 삶에 지친 이 시대의 어른들에게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추구할수록 만족감은 덜 해가며, 더 강렬한 것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여기 누구나 한 번은 있을 법한 이야기들을 스트링이라는 실로 잘 엮어내 소박함과 담백함을 뽐내고 있는 음반이 있다. LUCY의 첫 정규 [Childhood]는 삶에 찌들어 지친 어른들에게 순수함을 담고 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음반이다.


이 앨범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사운드는 단연 스트링이다. 어린 시절 혹은 동심을 소재로 했기에 동화적 분위기의 대명사라고도 할 수 있는 스트링 사운드는 이 앨범에서 가장 돋보이며 주가 되는 모습을 보인다. LUCY의 차별성이기도 한 바이올린은 자연스레 이 음반의 차별성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소재와 사운드가 이처럼 잘 어우러진 음반을 앞으로의 LUCY에게서 더 기대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들 정도로 잘 만들어진 음반이라 본다.


해 뜨는 출근길보다는 해 지는 퇴근길에 어울리고, 다른 일을 하며 흘려듣기보다는 가만히 앉아 감상할 때 더 좋은 [Childhood]는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그러나 지친 삶을 살아가는 어른들에게 잠시나마 쉴 곳을 내어준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가지지 않을까.





"이 정도 했으면 ‘그 시절’ 제일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정!"


4. 베이빌론 (Babylon) - [EGO 9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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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9 : 올해 가장 돋보이는 기획을 선보인 작품으로 기억할 만하다. 엄정화, 앤원 (Ann One), 업타운, 이현도, 김범수, 임정희, 영준(브라운아이드소울), 휘성 등 한국의 90년대, 2000년대 흑인 음악을 주도하던 아티스트들을 섭외해 18 트랙의 앨범을 밀도 있게 채웠다. 뿐만 아니라 크레딧을 통해서 ‘Creative Director’라는 역할로 나얼과 힙합저널리스트 김봉현이 참여한 것도 확인할 수 있다. 베이빌론이 이 앨범에 쏟은 열정과 정성을 가늠할 수 있는 지점이다.


베이빌론이 이토록 구현하고 싶어한 90~2000년대 한국 흑인음악은 본작에서 모자람 없이 실현되었다. 90년대 컨템포러리 알앤비부터 네오소울, 2000년대식 (알앤비를 가미한) 발라드, 뉴잭스윙 등의 다채로운 장르들로 구성된 앨범은 창작자와 비슷한 음악을 듣고 자란 특정 리스너층의 향수를 자극한다.


주인공인 베이빌론의 퍼포먼스도 빼놓을 수 없다. 곡에 따라서 때로는 부드럽게 흘러가는 듯하다가, 어느 지점에서는 선명하고 시원하게 찔러주는 보컬의 능력과 표현범위는 이미 그의 실력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탄하게 된다.


이 앨범에 수록된 개별 곡들이 싱글로 발표되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감흥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베이빌론의 90년대(와 2000년대) 음악에 대한 애정은 앨범 단위에서 더 구체적이고 확실하게 드러날 수 있었다. 다시 한번 베이빌론의 기획력에 박수를 보낸다.





"지옥… 오히려 좋아"


5. Rina Sawayama – ‘This H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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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봄 : Rina Sawayama의 정규 [Hold The Girl]의 리드 싱글 ‘This Hell’을 감상하며 가장 먼저 떠오른 아티스트는 Lil Nas X였다. 당당하게 커밍아웃을 하고, 퀴어에 대한 메시지를 곡에 담고, 또 “hell”이라는 소재로 비판에 맞서는 모습이 서로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Rina Sawayama는 Lil Nas X처럼 지옥으로 봉춤을 추며 떨어지거나, 악마와 트월킹을 하거나, 혹은 샤워실에서 나체로 춤을 추는 등의 매운맛은 최대한 배제하는 모습을 보인다. 단순하게 프라다를 입고, 다른 인물들을 언급하며 지옥으로 당당히 걸어가는 행보는 비교적 온건하기도 혹은 비교적 논리적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일렉 기타 리프와 당당한 걸음걸이를 닮은 드럼 리듬은 이 곡의 가장 큰 강점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혹자는 비교적 곡의 구성이 간단하고, 반복되는 기타 리프가 지루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를 모두 상회할 만큼의 중독성과 신선함이 있었다는 생각이다. 메시지도 가볍지 않은데, 곡까지 무거울 필요가 있을까. 무겁고 진중한 지옥보다는 가볍고 즐거운 지옥을 만들어야, 엿 먹일 맛이 났을 것이다.





"올해의 자장가"


6. Ravyn Lenae - ‘Lullab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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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9 : 라빈 르네의 첫 정규 [Hypnos]는 2022년 발표된 앨범 중에서 손에 꼽을 만큼 인상적인 알앤비 음반이었다. 그리스 신화 속 ‘수면의 신’의 이름을 타이틀로 삼은 만큼 몽롱하고 나른한 무드가 특징인 앨범인데, 그중에서도 ‘Lullabye’는 제목처럼 밤에 가장 듣기 좋은 노래였다.


르네의 보컬은 확실히 90년대 네오소울의 DNA를 품고 있다. 가깝게는 Nao, 멀게는 Erykah Badu를 연상시키는 기교와 가성 스타일이 돋보인다. 특히 힘을 쭉 뺀 채로 부르는 보컬의 매력은 너무 강력해서 마치 인어의 노래 같다. 자장가라는 테마에 걸맞게 자극적이지 않은 탑라인과 보컬 하모니 운용도 적절하다.


곡의 프로듀싱을 맡은 Monte Booker의 트랙 메이킹도 역시 주목할 만하다. 결코 단순하지 않은 악기 구성과 사운드 메이킹을 난잡하지 않게끔 정리하고 편안하게 들리게끔 다듬는 것은 보통 실력으로는 힘든 작업이었을 것이다.


한편, 올해의 외국 싱글을 고르면서 생각했던 질문은 이런 것이다. 어떤 음악이 좋다, 혹은 인상적이다라고 말할 때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보통 ‘확실한 기승전결을 가지고 터질 때 터지는가’, 혹은 ‘곡이 품고 있는 에너지가 강력한가’를 잣대로 평가될 때가 많다. 멜로디를 따라하게 되는 중독성과 대중에게 끼친 영향력도 빼놓을 수 없는 기준이 된다. 정리하건대, 사람의 마음과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만큼의 에너지를 품고 있는 음악이 ‘좋은 음악’으로 불릴 자격을 갖춘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충분히 ‘올해의 싱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음악 중에도 좋은 음악들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올해 릴렉스가 필요했던 여러 나날들 속에서 작은 휴식이 되어주었던 곡 ‘Lullabye’는 적어도 나에게 올해의 싱글이다.





"일단 맛이 있잖아… 그럼 됐지."


7. Wurts – [MOONRAKER]

동봄 : 올해의 싱글이나 앨범을 꼽는 데에 거창한 이유가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이 음반 [MOONRAKER]에는 그러한 거창한 이유가 없다. 이 앨범보다 더 좋은 음악성을 가진 해외 앨범도 많으나 굳이 이 앨범을 꼽은 이유는 그러한 앨범들보다 이 앨범을 더 많이 감상했기 때문이다. [MOONRAKE]의 수록곡 대부분은 숏 폼을 위시해 짧은 러닝 타임을 가졌으며, 뭐 대단한 음악성과 의미를 가진 것도 아니다. 그러나 앨범을 감상했을 때의 신선함이나 청취 경험이 상당히 괜찮았다. 그렇기에 이 앨범을 많이 돌려 들었다. 이 앨범이 올해의 앨범에 꼽히게 된 이유는 그런 기본적인 차원에 있다.


Wurts의 이전 음원들을 감상해 보니, 생각보다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은 아티스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락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힙합이나 일렉트로니카를 커버할 수 있는 아티스트라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번 [MOONRAKER]를 기점으로 락과 일렉트로니카를 겸하는 아티스트로 방향을 잡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글렌 체크와 같은 스타일의 아티스트가 탄생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현재까지 블랙뮤직의 최전방"


8. Sudan Archives - [Natural Brown Prom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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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9 : 현대 예술에서 창의성, 신선함이 발생하는 원리는 서로 다른 것을 섞는 데 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그런 기준에서 수단 아카이브스의 이 앨범은 2022년 가장 창의적인 앨범 중 하나다. 첫 트랙 ‘Home Maker’에서 다양한 악기, 샘플들이 나오고 빠지고 또 뒤섞이면서 자아내는 감흥은 놀라운 것이었는데, 앨범이 진행될수록 이 감흥은 힘을 잃는 게 아니라 힘차게 뻗어나간다.


앨범의 다채로운 사운드는 수단의 음악적 스펙트럼과 역량을 증명한다. 일렉트로닉, 아프리카 민속 음악, 아이리쉬 포크, 트랩, 힙합 소울 등 다양한 장르가 담겨있는데 이를 통제하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구현해내는 수단의 프로듀싱과 퍼포먼스가 흠잡을 데 없다. 참고로 수단은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한데, 그런 그녀의 특기는 앨범 곳곳에 녹아들어 있다. 물론 바이올린의 소리를 평범하게 쓰지는 않았다. 곡마다의 장르와 분위기에 잘 묻어날 수 있게끔 세심하게 가공된 사운드로 연주되고 있다.


이 앨범의 뻔하지 않음, 전위적인 특성은 결코 난해함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앨범의 주인공 수단 아카이브스가 확실하게 방향과 목표를 가지고 흐름을 잘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중간중간 skit에 해당하는 트랙들을 포함시켜 적절하게 분위기를 환기하는 것까지 신경 쓰고 있다. 넘치는 창의력을 선보이면서도 보편적인 감각 역시 놓치지 않는 놀라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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