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년 동안 케이팝에는 ‘덕질 + 창작 + 수익’의 형태가 눈에 띄게 많아졌다. 이전에는 기획사에서 음악, 영상 등의 콘텐츠를 제공하면 팬들은 감상 후에 좋고 싫음에 대해 평가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요즘 케이팝 팬문화는 그것을 단순히 받아 보고 즐기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팬들은 직접 크리에이터가 되어, 모든 콘텐츠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긴다. 팬들은 소비자인 동시에 외부의 기획자이자 마케터인 셈이다. 이는 코로나19 발발 이후에 국내에서 틱톡, 유튜브 쇼츠, 인스타그램 릴스 등 다양한 숏폼 콘텐츠의 선풍적인 인기로 가능했다. 이와 관련하여 이러한 덕질 양상을 집약할 수 있는 단어가 등장했는데, 2022년에 SM엔터테인먼트는 ‘Play2Create’란 키워드를 제시했다. 개개인이 데이터를 가공하고 수익을 창출하는 웹 3.0 시대에 맞춰, 팬들이 주체가 되어 창작하는 ‘P2C(Play2Create)’ 환경을 구축하겠다고 발표했다. SM이 생산하고 보유한 IP를 제공하고, 팬들이 이를 재창작하여 생겨난 IP를 SM은 활용할 수 있게 되는 선순환 구조이다.
소속사보다 일 잘하는 팬들이 있다? 아이돌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팬들은 그들의 매력을 누구보다 잘 알 수밖에 없다. 팬들은 회사에서 제공한 콘텐츠를 재가공하여 짤, 쇼츠 등을 적극 활용하여 업로드한다. 그 예로, 위 사진과 같은 짤들이 생성되었다. 케이팝 관련 콘텐츠 소비자라면, 이미지의 인물들이 누군지 몰라도 쉽게 볼 수 있는 짤과 영상이다.
또한 덕질 관련 영상은 아이돌 영상에 그치지 않는다.
위 두 명은 덕질 관련 영상을 업로드하는 유튜버들이다. 일명 ‘덕질로그(덕질+브이로그)’로 유명하다. 물론 덕질 관련 영상만 올리는 것이 아니라, 덕질과 상관없는 자신의 일상 관련 브이로그도 업로드한다. 팬들은 덕질이라는 공감대로 유입되어 구독하고, 이들의 영상을 보다가 팬이 되는 경우가 많다. 아이돌이 등장하지 않는 영상에도 팬들은 열광하며, 덕질 유튜브 채널 안에서 그들만의 커뮤니티가 형성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덕질을 매개체로, ‘덕후의 덕후’라는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었다.
케이팝 뮤직비디오에 세계관이나 스토리텔링이 담기고, 팬들이 이를 해석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현상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다만 팬들이 케이팝 뮤비를 해석한 내용을 글로 써서 포스팅하고 영상을 제작하여 올리는 것은 자신의 ‘본진(자신이 덕질하는 아이돌)’ 한정이었다. 케이팝 세계관과 뮤직비디오의 스케일이 커지게 되면서, 이를 전문적으로 파고드는 유튜브 채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발매되는 케이팝 신보 관련하여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이스터에그, 아이돌의 서사, 노래 가사의 숨겨진 의미 등 다양한 요소들을 찾아 해석 영상을 주기적으로 업로드한다. 이들은 아이돌 소속사에서 제작한 콘텐츠를 소재로, 그 콘텐츠를 제대로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발판을 제공하는 셈이다.
세계관이라 하면 어떤 키워드들이 떠오를까? ‘초능력’… ‘메타버스’… 생각만 해도 어지럽고 복잡하다고 느끼는 분들이 많을 거다. 가장 최근 세계관 관련하여 큰 이슈였던 걸그룹 에스파를 예로 들겠다. 에스파는 2020년 11월 코로나19 상황에 데뷔하여, 팬들과의 대면 소통 없이 활동을 시작했다. 이 데뷔 환경은 그녀들의 메타버스 세계관에 팬들이 몰입할 수 있도록 힘을 더했다. 이 세계관에는 에스파 휴먼 멤버들의 인터넷 정보를 기반으로 아바타(ae) 멤버들이 등장하는데, 악플과 딥페이크 등 기술 발전에 따른 케이팝 아티스트의 인권 문제와 넷상 혐오 문제 등을 다루는 스토리가 전개된다. 이 스토리의 전개가 앞으로 버추얼 아티스트와 A.I. 같은 요소들이 대중화될 경우, 인간과의 상생을 도모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해결책을 제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대면 시대에 걸맞은 컨셉으로 시의적절하게 성공적으로 데뷔한 에스파를 향한 열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2022년 7월에 데뷔한 뉴진스는 에스파와 완벽히 대척점에 있는 걸그룹으로 등장했다. 에스파의 메타버스, 아바타 컨셉과는 반대로, 뉴진스는 ‘자연스러움’ 그 자체를 추구했다. 1-2년 전까지만 해도 복잡하고 심오한 컨셉은 아티스트의 아이덴티티이자 차별화 방식이었다. 뉴진스의 등장은 그 양상을 변화시켰다. 염색을 하지 않은 긴생머리와 오버사이즈의 티셔츠, 펑퍼짐한 청바지를 입은 그녀들은 대중에게 신선함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했다. 기존의 케이팝 산업을 따라가지 않는 민희진 대표의 기획과 제작 방식은, 낮은 인지도에 차별화 방식으로 복잡한 세계관을 고집하던 다른 그룹들의 적신호를 켜버린 셈이다.
물론 보이그룹들은 예외이다. 보이그룹은 걸그룹에 비해 대중성이 부족한 편이다. 여성팬들은 걸그룹, 보이그룹을 둘 다 소비하는 한 편, 남성팬들은 걸그룹에 비해 보이그룹을 소비하는 경우가 현저히 적다. 여성으로 대부분 분포된 보이그룹의 팬층은 학습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세계관을 파헤치고자 하는 열정이 넘쳐난다. 그에 반해 엄청난 밈으로 유행한 에스파의 메타버스 세계관 정도가 아닌 이상, 걸그룹의 다양한 연령대의 팬들에게 세계관까지 학습시키기란 힘들다. 또한 최근 다양한 4세대 걸그룹의 등장으로 걸그룹 호황기를 누렸는데, 본인들의 성장 서사를 기반으로 컨셉을 잡은 르세라핌과 캐치한 음악과 나르시시즘 컨셉의 아이브가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와 같은 다양한 컨셉의 걸그룹 등장으로, 상대적으로 에스파는 상대적으로 복잡하고 어려운 컨셉의 걸그룹으로 비치게 된다. 이제는 에스파의 음악과 세계관을 어느 정도 분리시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by 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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