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EX, LE SSERAFIM, 태양, Aaron Taylor 외
동봄 : 이전에도 마주쳤을 수 있겠지만, 기억 속 EPEX에 대한 첫인상은 윤하의 명반 [END THEORY]의 수록곡 ‘오르트구름’에서 시작됐다. 코러스 보컬로 참여한 EPEX를 홍보하기 위해 작성된 앨범 소개 속, “EPEX의 참여, C9 유니버스의 비행을 알리는 신호탄일까?”라는 문장은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 일단 뇌리에 박히는 것에는 분명 성공했다. 이후 C9 유니버스가 정말 비행 중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앨범으로 본 EPEX는 웬만큼 순항 준비가 끝난 것 같다.
언뜻 보면 TXT의 앨범 작법을 따라가는 듯한 EPEX의 앨범 연작들은 비로소 5집이 되어서야 자리를 잡은 듯한 모습이다. 불안과 사랑처럼 양극성을 띠는 주제를 단순 반복하거나, 두 앨범에 걸쳐 ‘~~歌’라는 타이틀을 제목으로 삼는 이전의 시도들은 앨범들에 나름의 통일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당위성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당위성을 5집의 “성장통”이라는 키워드가 마침내 완성시킨다. 나아가 각 트랙을 지나며 사랑, 이별, 수용을 거치는 시퀀스는 큰 기법을 필요로 하지 않고도 소년이 사랑의 성장통을 겪는 모습을 직관적으로 전달한다. 특히 그 중심에 있는 타이틀 ‘여우가 시집가는 날’이 끌어온 “여우비”라는 소재는 스토리적 참신함과 묘사로 자칫 비참해 보일 수 있는 스토리를 꽤나 웃프게 포장한다. 그리고 이 스토리는 마침내 funky한 트랙과 매력적인 탑 라인에 자로 잰 듯이 착 달라붙는다. EPEX의 이번 앨범은 컨셉이나 음악적으로 최대한 무거워지려는 보이 그룹들 사이의 틈새를 제대로 노린 셈이다.
그러나 두 가지 아쉬운 부분이 존재한다. 하나는 랩 파트이고, 다른 하나는 MV이다. 2절의 시작을 알리는 8마디의 짧은 랩 파트는 가벼웠던 분위기를 한순간에 가라앉혀 버리는 모습이다. 그나마 뒤의 4마디에 추가된 기타 사운드가 힘을 써보지만, 이미 8마디는 곡의 분위기에서 엇나가 있다. 다양성을 부여하는 차원에서는 좋은 시도이나 곡 특유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기에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MV의 경우에는 근본적으로 곡과 너무도 맞지 않는 모습이다. 색감도 곡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고, MV의 흐름 역시 와닿지 않았다. “여우비”라는 소재 자체가 맑은 날 내리는 비이기에, 굳이 야외가 아니더라도 하늘색과 같은 밝은 계열의 색감을 사용했으면 분명 좋게 느껴졌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프로덕션의 방향을 그렇게 잡은 이유가 있겠지만, 굳이 MV까지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준9 : 르세라핌은 4세대 걸그룹 중 가장 콘셉트와 메시지가 확고하다. ‘두려움 없이’, ‘깨질수록 강해지며’, ‘금기에 도전한다’는 메시지는 강하고 의욕적인 에너지를 담고 있다. 이런 메시지를 담아내는 형식 역시 의욕적이다. 발표한 3장의 앨범 모두 앨범 명이 타이틀 곡명과 일치하는 건 물론이고, 대문자 사용으로 확실하게 힘을 주는 방식이다. 언뜻 ‘자기애’라는 키워드를 내세우는 아이브와 비슷해 보일 수도 있지만, 르세라핌은 보다 더 선동적이고 노골적이다. 이번 앨범 타이틀곡 ‘UNFORGIVEN’에서의 “나랑 선 넘어 같이 가자”나, 수록곡 ‘Fire in the belly’의 “너 내 동료가 돼라” 같은 라인들이 그 예시다.
그런데 이러한 콘셉트를 뒷받침해 줄 음악에 다소 아쉬움이 있다. 대표적으로 타이틀 곡 ‘UNFORGIVEN’. 곡의 전략은 지난 ‘FEARLESS’나 ‘ANTIFRAGILE’와 비슷하다. 리듬이 강조된 3분 남짓의 짧은 곡에서 중독적인 포인트를 심는 구성 전략을 따르고 있지만, 이전 두 곡에 비해 ‘UNFORGIVEN’의 후렴 탑라인은 임팩트가 많이 약하다. ‘ANTIFRAGILE’과 비슷한 인상을 준다는 점도 이 곡을 매력적으로 느끼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다. 또한 ‘UNFORGIVEN’의 기타 테마는 피처링에 표기된 나일 로저스의 이름이 부풀린 기대감을 전혀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그의 특기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술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특별할 것이 없다는 점이 실망스럽게 느껴진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키워드에 맞게 웨스턴 풍의 편곡 요소를 넣는 등 나름의 재미있는 음악적 요소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곡의 단점은 너무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앨범 단위로 봐도 아쉬움은 마찬가지다. 13곡 중 기성 발매곡을 제외한 신곡 7곡의 주제는 ‘금기에 대한 도전’, ‘모험’이다. 그런데 각 곡의 장르와 무드가 너무도 판이하게 다른 탓에 흐름이 자연스럽지 않고 르세라핌의 음악적 정체성을 구축하는 데 충분히 기여하지 못한다는 인상이다. 더군다나 팬송 ‘피어나 (Between you, me and the lamppost)’는 앨범의 맨 마지막이 아닌 11번에 배치되어 있어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무리 정규앨범의 가치와 의미가 약화되어 가는 요즘이라고 해도 아티스트의 음악적 기량과 정체성을 증명하고 강화시키지 못하는 앨범에 대해선 회의적인 감정이 들 수밖에 없다.
앨범 홍보 일환으로 팝업스토어를 오픈할 수 있을 만큼 자본력이 있는 회사에 속해 있음에도 르세라핌의 음악적 기반은 아쉽기만 하다. 그들의 콘셉트를 가장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방법은 음악일 수밖에 없다. 그들이 가수로 데뷔한 이상은 말이다.
미온 : 태양이 6년 만에 선보인 앨범, [Down to Earth]이다. 6년이라는 시간 때문에 더 큰 기대를 가졌던 탓일까. 잘 영근 태양의 보컬에 비해 곡들은 어딘가 심심하다. 타이틀곡 '나의 마음에' 또한 그렇다. 90년대 한국 발라드의 느낌을 잘 살리긴 했지만, 스트링 연주가 쌓이고 보컬이 폭발하는 후반부 이외에는 큰 매력을 느끼기 어려웠다. 태양은 워낙 리드미컬한 R&B을 잘 구현해 내는 보컬이라 그런지, 사운드가 단순해질수록 그의 유니크함이 옅어지는 느낌이 강했다. 차라리 '눈, 코, 입'과 유사한 테마를 구성하는 게 그의 장점을 더 돋보이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지민이 참여한 'VIBE', 블랙핑크 리사가 참여한 'Shoong!' 또한 지민과 리사가 상대적으로 뾰족한 톤을 가진 터라 포커스가 태양이 아닌 이들에게 자꾸만 옮겨지곤 했다.
반면에 네 번째 트랙 '나는'과, 마지막 트랙 'Nightfall'은 그의 색채를 짙게 드러내는데 적합했다. '나는'은 말랑한 사운드를 중심으로 70년대 소울 느낌을 풀어나가면서, 간주에는 끈적한 색소폰 연주를 배치해 감칠맛을 잘 살렸다. 마지막 트랙 'Night Fall'은 경쾌하면서도 에너제틱한 신스팝 곡으로, 6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가 겪었던 고뇌와 깨달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트랙이다. "얼룩져 버린 나의 영광을 찾기 위해" 초심으로 돌아가겠다는 그의 다짐이 담겨 있기에, 이 앨범 안에서 뿐만 아니라 그가 여태껏 선보였던 곡들 중 가장 진솔하게 느껴진다.
전반적으로 밋밋한 감이 있는 앨범이지만, 마지막 트랙의 존재로 이 앨범의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태양이 진 후의 시간들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초심으로 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초심으로 향하는 그 길이 아직까지 명확하진 않지만, 부단히 찾아 나서겠다는 그의 외침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 그 다짐은 태양만의 'VIBE'를 찾는 데에도 한몫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작이 반이라고, 음악 활동만 꾸준히 해준다면 그의 진솔한 음악들은 앞으로 더 많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준9 : 언젠가부터 알앤비는 죽어가고 있다. 차트의 성적, 장르의 영향력을 봐도 그렇고, 알앤비 기반의 신예 가수 등장이 뜸해지는 흐름만 봐도 그렇다. 사랑하는 장르가 힘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누구보다 슬픈 것은 장르 씬 안의 뮤지션들일 것이다. 하지만 주목받지 못하더라도 좋은 알앤비 음악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티스트들은 여전히 많다. 그중 한 사람이 아론 테일러다. 그의 신보엔 유명하지 않은 알앤비 뮤지션의 심경과 태도가 담겨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기본적으로 네오소울을 기반으로 한 뮤지션이지만 정통하고 딥한 방향보단 대중적으로 쉽게 풀어내는 데에 목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앨범 동명의 곡이자 첫 트랙인 ‘Have a Nice Day’부터 그렇다. 킥 드럼과 신스 베이스가 형성한 리듬 테마 위에서 여러 악기들과 코러스가 옹기종기 모여 만드는 따뜻한 사운드는 누구라도 좋아할 만한 종류의 것이다. 가사 역시 마찬가지다. 하루하루 버티듯 살아가는 이들에게 보내는 희망과 응원의 메시지는 음악과 어우러지며 시너지를 얻어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어줄 만큼 힘 있게 다가온다.
그런데 이 따뜻하고 다정한 앨범을 끝까지 듣고 나면, 작품이 누구보다 아론 테일러, 자신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Your validation doesn't faze me, it's wasted (당신의 검증은 나를 당황하게 하지 않아요, 소용없어요)”(‘Ebbs and Flows’) 혹은, “I gotta keep waiting. But waiting ain't fun(나는 계속 기다려야 해요. 그건 재밌는 일은 아닙니다.)” (‘Patience‘) 등의 가사 구절은 비인기 뮤지션으로 살아가는 그의 현실이 반영되면서 청자가 화자에게 더욱 감정이입할 수 있는 요소가 된다.
짧은 분량임에도 인상적인 앨범을 만들 수 있었던 열쇠는 훌륭한 음악 덕이기도 하지만 결국 가사의 힘이었다. 아론 테일러는 자신의 개인적인 처지에서 보편적인 요소를 끄집어내어 작품으로 녹여낼 줄 아는 아티스트임을 이 작품으로 증명했다.
미온 : 2021년에는 Lil Nas X와 함께 한 'INDUSTRY BABY'로, 2022년에는 ‘First Class’로 빌보드 핫 100 1위를 차지했던 Jack Harlow의 신보, [Jackman.]이다. 트랩 기반의 팝 랩으로 주가를 올리던 그가 이번에는 상당히 미니멀한 사운드를 들고 왔다. 이전 앨범 [Come Home The Kids Miss You]의 'First Class'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그 배경은 'Denver'의 가사를 통해 엿볼 수 있다. 그는 이 곡에서 자신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언급함과 동시에, 스크린 속 자신의 모습에 권태로움을 느낀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부분들은 그의 자신감 저하에도 영향을 준 것처럼 보이는데, 이 상황을 탈피하고자 만들어진 게 이번 앨범이지 않을까. 그 결과물은 나쁘지 않다. 그의 플로우가 비약적으로 발전된 것도 아니고 사운드적으로 센세이션한 것도 아니지만, 확실히 이전 앨범보다는 탄탄해졌다. 무엇보다 플로우보다 비트에 비중을 둔 게 신의 한 수였다.
대부분의 트랙은 듣기 편안한 비트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흥미로운 작법을 활용하였는데, 그게 이번 앨범의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2000년대 중후반 힙합씬에서 유행했던 'Chipmunk Soul'을 활용했다. 이 작법은 R&B나 소울 음악 보컬을 샘플링해 음정과 속도를 조절하여 비트에 녹여내는 작법인데, 여러 트랙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다. 이를 활용한 'Gang Gang Gang'은 보컬 샘플링을 비트처럼 연출해 듣는 재미를 선사하고, 'Is That Ight?'는 2000년대 중후반 재즈 힙합의 향기를 느끼게 해 준다. 이러한 포인트들은 그의 실력을 증명해 주기도 하면서, 유명세를 얻은 잭 할로우가 아닌 본연의 잭 할로우를 소환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진중한 메시지가 곳곳에 담겨 있어서 충분히 들어볼 가치가 있는 앨범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이번 앨범이 잭 할로우에 대한 인상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 돌파구가 되기는 하겠지만, 무난한 톤과 스킬을 지속해서 가져간다면 그 효과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저 자기 확신으로 끝맺어지지 않도록 지속적인 변주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동봄 : 직전 싱글인 ‘Habit’이 상당한 히트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SEKAI NO OWARI라는 밴드를 떠올리면 여전히 동화적이거나 희망적인 대체로 밝은 느낌의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이들의 곡을 감상하면서 여타 장르나 분위기의 곡들보다 ‘RPG’나 ‘Hey Ho’와 같은 결의 곡들이 기억에 더 남았는데, 어쩌면 이런 점이 많이 작용한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번 싱글 ‘サラバ’에서도 그러한 느낌이 남아있는 모습이다. 가벼운 일렉 기타 사운드와 브라스 사운드가 곡의 전반에 경쾌하고 희망적인 분위기를 열심히 주입하고 있다. 특히 브릿지 파트에 자유분방하게 연주되는 피아노의 사운드가 이를 극대화하는 느낌이었다. 평소에는 굳이 찾아보지 않던 가사의 번역도 찾아보았는데, 곡의 분위기에 맞춰 가사 역시 희망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특히 어떤 블로거가 코러스 첫 가사를 “굿바이, 평범함이 고통이 되었던 나날들”로 번역한 것이 기억에 남았다. 어떠한 기준에도 적용받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평범함이 사실은 칼 같은 기준에 들지 못한 고통의 산물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이윽고 가사가 다르게 읽히기 시작했다. 시간, 규칙 등 매번 변하는 기준에 맞춰 평범하게 사는 삶이 고통이 될 때, 우리는 기준에서 벗어나 때때로 돌아서 갈 필요도 있다. 밝은 분위기에 담긴 위로나 충고, 이들의 음악은 어른에게 필요한 동화가 아닐까.
※ '준9', '미온', '동봄'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