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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곰 Feb 28. 2019

배소고지 이야기_작업일지②

2018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2019.03.01-10 대학로 예술극장

두 번째 이야기 : 나를 불러준 여인들


전주에서 조금 빠져나가면 물안개가 예쁘고 조용한 곳이 나옵니다. 바로, 임실 옥정호입니다.

운암호, 운암저수지 등으로 불리다 지금은 옥정호가 정식 명칭이 되었습니다. 옥정호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일단은 드라이브 코스이자 데이트 코스로 많이 알려져 있다는 것부터 말하게 됩니다. 물안개, 근교의 예쁜 카페, 호숫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의 매운탕 맛집들-


옥정호에 자주 가보았어도, 제가 알고 있는 정보는 겨우 이 정도여서 이 공간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 여성 구술사라면 평온하고 고요한 삶이나 소소한 일상의 기억이 중심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생각지도 못한 여러 이야기와 맞닥뜨렸습니다.


국군을 피해 굴에 숨었다가 질식해 죽은 400여 명의 양민들

좌익과 우익 양 진영이 권력을 잡을 때마다 발생한 겁탈 사건

배고소지의 양민학살사건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 남편, 시아버지, 친구, 알고 지내던 동네 사람들

그 사람들이 나를 버리고, 고발하고, 손가락질하고, 떠나고, 죽고-

내 삶의 이유였고, 삶의 부침이 있을 때 함께 버텨가야 할 그 누군가가 나를 외면한다면

그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이제는 할머니가 된 생존자의 이야기가, 누워있던 활자들이, 말이 없던 그 인생이 제 앞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함한희 교수님의 무형문화연구소 연구원들이 진행한 인터뷰와 짧은 구술 기록이 눈앞에 스크린으로 펼쳐지는 순간, ‘너무 뻔한 수식어이지만’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강연장 내에서 그 기구한 사건들에 탄식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 것도 기억합니다. 저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저를 더욱 괴롭게 한 것은 그러한 사건이 터졌을 때, 그녀들이 모두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의 앳된 소녀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서로를 고발하고 살아남은 경험, 피해자는 가해자가 되었다가 다시 피해자가 되고, 가해자와 방관자와 피해자가 입장이 바뀌면서 그들의 자녀들까지 그 관계 속에 엮어서 그곳에서 아직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아직도 쉬쉬하며, 감추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도 그렇습니다.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실감을 거기서 한 것 같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의 문제로 여겨졌습니다.


강의가 끝난 후 교수님과 연구소를 통해 인터뷰에 쓰인 각종 자료를 제공받았습니다. 저는 사실 전쟁이나 큰 담론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선택의 여지 같은 것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이 이야기를 기록하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작업관에도 큰 변화를 준 이야기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읽고 읽고 또 읽고. 밤이면 울면서 3주 동안 초고를 완성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글쓰기의 방식도 아니었습니다. 행동과 여백이 많은 이야기로 완성되었습니다. 4명의 여인들의 실제 경험이 중심이 되어, 이름을 갖지 못한 남자들이 등장하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저는 가해자로 지목될 수 있는 인물들이 특별한 개인으로 비치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그 인물이 역사의 모든 과오를 뒤집어쓰지 않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개인들의 탓으로 돌려짐으로써 전쟁의 의미가 희석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완성된 이야기는 제 부족함 때문이었는지 발표할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여러 공모전에서 번번이 낙방했습니다. 왜 이런 작품인가, 동시대적인 이야기를 쓰라는 피드백이 돌아왔습니다. 그럴 때 참 맥이 빠졌던 것 같습니다. 생존자들이 사라져 가는 지금이 아니면 대체 언제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일 년이 조금 넘어가던 시기.

뭘 더 고쳐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도저히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어느 날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함께 「이화원」을 했던 박희은 배우로부터.


“요즘 뭐해? 나 요즘 여성인물이 중심이 되는 작품을 찾고 있어.”


저는 대본을 들고 여배우들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배소고지 이야기-기억의 연못

    :2019.03.01-10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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