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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곰 Mar 02. 2019

배소고지 이야기_작업일지③

2018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2019.03.01-10 대학로 예술극장

세 번째 이야기 : 언니 옆에 언니 옆에 언니


2017년 2월의 어느 날. 떨리는 마음으로 ‘언니들’을 만나러 가는 길. 장소는 당시 프로덕션IDA의 (구) 연습실이었습니다.


프로덕션 ida의 구 연습실


당시 가제였던 「여인들」을 들고 정릉으로 가는 길은 무척 긴장됐습니다. 수업시간에 동료들끼리 수업의 일환으로 낭독해본 적은 있지만 모두 30대 초반의 젊은 작가들이었기 때문에, 40대 이상의 여배우만으로 구성된 모임에서 낭독된다는 것은 저로서는 무척 고무되는 일이었습니다.


글을 다 쓰고 나서야 발견한 것이지만, 작품을 쓰는 동안 무의식적으로 저에게 작용한 2가지가 있었는데..

첫째, 공연을 위한 어떤 것을 고려하지 않고, 가능한 하고 싶은 것은 다 쓴다!
둘째, 실제 80대 배우와 작업할 가능성보다 학생들과 작업할 가능성이 크므로, 비사실주의적 무대 구현과 연기술을 유도하는 대사와 지문을 쓴다!


이 작품은 공연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 자유롭게 쓰고 싶어서 쓴 작품입니다. 그전에는 속한 극단의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작품을 써야했고 그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고, 모든 것을 펼치듯이 작품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학교 안에서 수업시간에 초고를 발표했기 때문에 공연이 되더라도 학교 안에서 공연될 가능성을 고려하게 되었고, 그렇다면 80대 배우와 작업할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한 것 역시 작품의 형식을 결정하는 데 큰 몫을 차지했습니다.


당연히 저 혼자서라면 절대 만날 수 없는 여배우들인데다가 이렇게 한꺼번에 많이 만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연륜 있는 배우들과의 만남은 그 자체로 두근거리고 긴장되는 일이었습니다. 홍윤희, 백현주, 정윤경, 황세원, 박희은, 이서이. ‘희곡읽수다’라는 소모임에 제가 아는 사람은 2016년 「이화원」을 함께했던 박희은 배우뿐이었고, 낯을 무척 가리는 성격이어서 그날 손에 식은땀이 흥건했습니다. 배우들의 시선으로 읽으면 이 작품은 어떻게 보일까, 배우들의 음성으로 들으면 내게도 길이 보이지 않을까, 그런 간절함이 있었던 나날이었기에 긴장하면서도 기꺼이 연습실로 갔습니다.


모두들 사전에 대본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말 그대로 첫만남이었습니다. 그리 흔하지 않은 ‘전북’ 사투리와 기억이 가물한 전래동요까지.. 그래도 배우들은 허투루 날리는 대사 없이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살려서 읽어주었습니다. 제가 읽기 전에 전체 줄거리를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배우들은 낭독하는 동안 배우이면서 관객이기도 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작품 속 할머니들의 운명 앞에 함께 탄식하고, 안타까워하고, 때로는 함께 등장인물들과 상황을 욕(?!)하면서 작품에 깊이 몰입했습니다.


등장인물들과 함께 웃고, 우는 시간을 뒤로하고, 이어진 작품에 대한 피드백은 참으로 날카롭고 섬세했습니다. 질문을 주고받으면서 작가의 의도는 보이지만 정확하게 표현되지는 못한 장면에 대한 의견, 디테일의 정확성에 대한 질문 등 작품이 점점 또렷해질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 보는 배우들이었지만, 애정 어린 피드백으로 인해 작품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낭독과 피드백이 끝나고, 제가 어정쩡하게 앉아있는 자리에서 소모임이 이어졌고, 거기서 곧바로 ‘낭독 작품’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그것까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것도 당장 3월에 낭독을 하자는 기세에 저도 놀랐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장소에서 낭독을 연출할 연출가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약속 며칠 전, 박희은 배우에게 물었습니다.


“언니, 연출은 누가 해요?”

“응, 선희 언니라고. 혹시 알아? 박선희 연출님이라고.”


박선희 연출. 전주에서 대학로로 공연을 보러 수시로 올라오던 시절부터 박선희 연출의 여행 연극 시리즈를 다 본 터였습니다. 저와는 정반대로 발산하는 에너지를 가진 공연들이어서 항상 강한 인상을 받아왔습니다. 박선희 연출 역시 박희은 배우가 섭외하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처음 만나는 날, 약속시간보다 30분쯤 일찍 갔을 때, 이미 거기 박선희 연출이 앉아있었습니다. 대본을 읽고 있었습니다. 어색하게 마주 앉은 첫자리에서 소탈하고 호방한 목소리로 박선희 연출이 입을 열었습니다.


“사실 오늘 나 낭독 연출 거절하려고 나왔어요. 일정이 도저히 안돼서.”


순간, 머리가 하얘졌습니다.

아. 어쩌지.



<계속>






 배소고지 이야기-기억의 연못

 :2019.03.01-10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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