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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곰 Mar 07. 2019

배소고지 이야기_작업일지⑤

2018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2019.03.01-10 대학로 예술극장

다섯 번째 이야기 : 옥정호에 가다


첫 번째 낭독회 전, 그러니까 2017년 2월 중순경으로 잠시 시간을 돌려보겠습니다.


낭독 준비 과정은 꽤 순조로운 편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고민해왔던 것들이 연출과 배우들의 피드백 속에서 순조롭게 풀려나갔습니다. 무엇보다 작품을 있는 그대로 잘 들려주려는 노력들이 저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에 항상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예전에도 임실에 여러 번 가보았고, 작품을 쓰고 수정하는 동안에도 옥정호에 몇 번이나 갔었지만 진짜 ‘배소고지’에 가봐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찾을 수 있을까?라는 불안이 좀 있었습니다. 그곳을 밟아보는 일이 작품을 어레인지하는 데도 도움이 되겠지만, 단순히 그 문제로 그곳을 가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도구나 매체를 통해 무언가를 알아갈 수 있습니다. 간접 체험 역시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경험입니다. 또, 때때로 우리는 땅을 밟아보고, 그곳의 공기를 느끼기 위해 어떤 장소로 떠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무언가를 통해 알게 된, 보았던, 들었던 일을 ‘우리의 일’로 만들게 됩니다. 저는 이것이 저의 일이 되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정말로 ‘저의 일’이 될 수 있는 일은 아니겠지만,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는 것 역시 저의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형문화연구소를 통해 스토리 랩에서 받은 실제 녹취자료 및 기타 여러 자료 중에 지도가 있기는 했지만, 그 지도만으로는 정확한 위치를 찾기 어려워서 사실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연구소 쪽으로 동행을 요청하기도 어려울 것 같았는데, 무엇보다 규모가 커질수록 또다시 마을의 주민들을 들쑤시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결국 저는 오래간만에 임실 드라이브를 제안하는 척하며 부모님과 함께 나섰습니다. 가장 자연스러워 보일 것 같아서였습니다. 배소고지나 배소 마을은 행정상 없는 곳입니다. 논문에 실려 있던 작은 지도 한 장과 포털 지도들에 의지하여 배소고지를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옥정호를 도는 드라이브 코스가 있지만, 반대편으로는 전혀 도로나 길이 없는 곳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들 중 어느 언덕 언저리에 배소고지가 있을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사라져 버린 배소 마을과 배소고지의 흔적을 찾는 일이 수월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예감했지만, 아직 2월, 아직 봄이 오지 않은 황량함은 마음을 더욱 서늘하게 했습니다.


종이 지도와 포털 지도를 번갈아가며 알게 된 것은 실제로 갈 수 있는 길이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어디서도 물가가 보이는 곳, 사진 상으로 지목되었던 장소는 실제로 육안으로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그 근방에 차로 갈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뱅글뱅글 돌기를 한참, 결국 차를 세워두고 위치를 파악하던 중 한 무리의 할아버지들과 마주쳤습니다.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지다가 결국 물었습니다.


“배소마을 아세요? 배소고지라고 들어보셨어요?”


이 무리에는 외지 사람과 주민이 섞여 있었는데 들어본 적이 없다거나 모른다는 말 뿐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결국 없어진 마을이 있다는 것, 그곳으로 차는 들어갈 수 없고 깊숙이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것까지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손짓한 곳은 아까부터 한참 뱅글뱅글 돌며 지나쳐온 곳이었습니다. 그쪽에 길이 있다고?


굳이 거길 왜 가려고 하느냐, 찾아가기 힘든 곳이다, 거긴 아무것도 없다- 염려였을지 에둘러 말한 것이었을지 잘 모르겠는 애매함을 뒤로, 그 할아버지는 마저 방향을 일러주셨습니다. 그곳의 사건에 대해 묻지는 않았습니다. 그 일대 주민들이 이 사건에 대해 말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곳에 배소고지가 실제로 있을지도 확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실제 장소에 도착했을 때, 그곳을 알아본다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라진 배소마을로 추정되는 지역에 근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우 고무되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소나무 숲으로 관통해서 들어가는 길은 좁디좁아서 차는커녕 사람들도 여럿이 함께 걸을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이쪽으로는 계속 소나무 숲밖에 없을 것 같은데..?


“계속 안으로 들어갈 거야?”

“조금만 더 들어가면 될 것 같아요.”

“얼마나 더 들어가려고?”

“조금만 더요. 조금만.”


안쪽으로 더 들어가자, 계속 이어질 듯한 소나무 숲이 뚝, 끝났습니다. 소나무 숲 흙길을 관통하고 나오니, 거짓말처럼 언덕이 펼쳐졌습니다. 언덕 안쪽으로 쭉 내려가자 콘크리트를 부어 만든 거칠고 좁은 길이 나있었습니다. 바깥으로 연결되는 길은 아니었습니다.

콘크리트 길 반대편으로는 길이라고 할 수 없는 길들이 있었습니다. 아마 지도상으로는 그쪽으로 내려가야 배소고지를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습니다만, 길을 찾는 것 자체가 어려웠습니다. 수풀을 헤치고 내려가 봤지만, 높게 자란 잡풀들이 겨우내 말라 서로 얹어져 있어서 본래의 풍경을 짐작하기 어려웠습니다. 결국 그쪽으로 내려가기를 한참, 다시 반대쪽을 향해 다시 올라왔습니다.

언덕으로는 계단식 논이 층층이 물가 아래까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옥정호가 펼쳐져 있습니다. 물가에는 도로가 없이 평지가 펼쳐진 고요한 풍경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간혹 띄엄띄엄 몇 채의 집이 있었습니다. 그마저도 외지에서 들어온 누군가가 별장으로 세운 것 같은 집도, 전부터 여기에 살았을 법한 집도 서로 멀찍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과연 마을이라고 하기 에는 어려웠습니다. 이상하리만치 고요한 오후였고, 메마른 회색빛 콘크리트 길로 오가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언덕의 계단식 논들은 그 집주인이나 인근에 사는 다른 누군가의 논이었겠죠. 추수를 다 마치고 겨울을 나고 있는 논에 이상하게도 물이 찰랑찰랑 차있었습니다.


“겨울에 논에 이렇게 물이 차있는 거, 흔한 일이에요?”

“아니지.”


아버지는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저는 말을 잇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때부터는 사진만 찍고 복잡한 마음으로 언덕을 내려갔습니다. 한겨울에 얼지 않고 물이 흐르는 논. ‘배소고지’의 ‘지’가 연못을 의미하는 池인지 높은 곳을 의미하는 高地인지 물가(바다) 쪽을 향한 육지의 끝부분을 의미하는 ‘곶’에서 온 말인지 사실 알기 어렵습니다.


제가 이미 자의적으로 선택한 것은 ‘연못’. 그것이 작품의 부제인 ‘기억의 연못’이 되기도 했습니다만, 이곳에 오기 전에 지은 부제의 형상이 실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숨이 무거워졌습니다. 양민들이 끌려온 곳이 이런 웅덩이들 중 하나였을까,라고 생각하니 견디기가 어려웠습니다. 내려갈수록 언덕과 계단식 논 사이의 이곳저곳에 숨겨진 웅덩이들이 드러났고, 논들의 옆으로는 계곡에서 물이 흘렀습니다.


물가 아래까지 내려가자 펼쳐진 넓은 평지. 어쩌면 이런 곳에서 빨래를 하지는 않았을까. 온갖 상상을 하며, 이곳을 뛰어다니는 어린 소녀들을 상상하며, 오래도록 물가를 바라보았습니다. 봄 냄새가 조금 나는 느낌이었습니다.


결국 배소고지와 그 바위에는 닿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근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했습니다. 애초에 생존자를 만나는 일을 목표로 하진 않았습니다. 그분과 가족들에게도 실명과 사진을 공개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인터뷰에 응한 이유가 있었을 테니까요.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는, 황량하고도 축축한 폐허, 그것이 제가 배소고지에 대해 갖게 된 이미지입니다. 소나무 숲을 빠져나오자 그 거짓말 같은 시간, 문이 닫히는 기분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어두워지기 전, 그 모든 풍경을 뒤로하고 흙길을 관통해 다시 전주로 돌아오는 길. 이 마음과 이야기를 연습 중인 연출과 배우들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옥정호에서 다시 서울의 연습실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옹기종기 모여 그곳의 사진을 보면서 잠시 침묵했습니다. 실제 배소고지의 사진은 아니었지만 그곳의 풍경을 보면서 각자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라져 버렸지만 사라지지 않았고, 거기 있지만 찾기가 너무 어려운 것들. 그날 우리는, 우리가 함께 전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라는 것을 아마도 공유했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계속>



+ 첫 번째 낭독회 리플릿에 썼던 글 일부를 더해봅니다.

며칠 전에 배소고지 사건이 발생했다는, 이제는 사라져 버린 배소 마을(로 추정되는 곳)에 다녀왔습니다. 변변한 차도조차 없는 곳, 기억하는 주민도 드문 곳이었습니다. 소나무 숲 흙길을 관통해 들어가니 비밀의 화원처럼 펼쳐진 쓸쓸한 언덕에는 흔적만 남은 집터와 언덕 구석구석에 고인 웅덩이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웅덩이 어느 자리에 그 슬픔이 고여 있는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배소고지 이야기-기억의 연못

:2019.03.01-10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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