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가 사랑한 수식
기억은 기계적인 저장일까. 강경옥 작 <별빛 속에> 주인공 시이라젠느는 고향별에서의 여정을 마치고 지구로 돌아온다. 지구 밖에서 겪은 일은 모두 지워진다. 지워졌으나 그녀는 눈물을 흘린다. 기억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감정에 가슴이 아프기 때문이다. 저장된 데이터는 삭제되면 완전히 소멸하는 게 맞을까? 컴퓨터가 점점 느려지는 것처럼 무언가 있던 자리는 비워져도 그전과 같을 수 없다. 흔적은 분명 남는다.
사랑과 미움도 기억할 수 있을 때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문정은(이정은 분)은 김혜자(김혜자 분)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자 망연자실한다. 두 사람은 직업이 같고, 함께 일하며 다진 우애와 신뢰가 두텁다. 오래된 관계가 단번에 끊겨서 정은은 애달파한다. 혜자는 아들 대상만은 최후의 최후까지 기억하려 애쓴 것 같다. 그녀는 아들에게 미처 내어주지 못한 사랑이 숙제처럼 남아있기 때문이다. 몸이 쇠하고 병들어도 놓을 수 없었던 그 사랑은, 그녀가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자 마침내 전해졌다. 평생 어머니의 짐이 되었다는 죄책감을 졌던 아들은 비로소 괴로웠던 마음을 내려놓는다. 희끗희끗한 머리에 눈이 내리는 날, 대상(안내상 분)은 뜨거운 울음으로 설움을 토한다. 그리고 홀가분 해진다.
젊은 모습의 혜자(한지민 분)에게 붕어빵을 사다 주는 다정한 아빠는 실제 혜자의 아버지, 그러니까 대상의 외할아버지다. 대상의 실제 성격은 자세히 알 수 없다. 혜자 남편인 준하(남주혁 분) 역시 본연의 모습이 충분히 그려지지 않는다. 불행한 가족 관계와 상처로 인해 마음을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마음을 닫은 사람. 그냥 무뚝뚝하고 주변머리 없고 답답한 사람. 겉으로 보이는 이 느낌이 정말 그 사람이 맞을까? <눈이 부시게>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혜자의 기억으로 묘사된다.
사람은 기억으로 존재한다
책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는 천재적인 수학자가 나온다. '천재적'이라는 표현은 일반적인 기준으로 특정 재능을 더 가진 사람이라는 선망에서 비롯한 걸까? 나는 천재는 재능과 함께 위태로움까지 선물 받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천재 수학 박사는 기억이 하루를 넘기지 않는다. 박사의 '위태로움'은 그가 40대부터 겪은 기억력 상실인 셈이다. 원인이 된 교통사고는 우연이지만 말이다. 박사는 최근 기억을 저장할 메모리가 80분뿐이지만 젊은 시절까지 폭발적으로 키워왔을 수학적 재능과 지식은 온전히 남아있었다. 수학이 곧 그의 세계요 수식은 세상을 보는 그만의 프레임이다. 영화로 표현된 박사는 외모와 연기가 좀 더 젊게 표현되었는데, 책 속에 묘사된 그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살짝 닿으면 바스러질 것 같은 느낌이다. 박사의 곁을 지키는 유일한 가족은 공유된 기억에 거리를 두고 있고, 가정부로 일하는 쿄코(후카츠 에리 분)와 그의 아들은 거의 한 시간 단위로 박사와의 기억을 새로 채워 관계를 잇는다.
기억이 불러오는 감정
지금 마시는 한 잔의 음료는 나의 뇌가 쓰는 에너지로 대부분 쓰일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것들은 모두 감정을 만들고, 감정은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렇게 살았다. 다행스럽게 이마 쪽에 있는 중앙통제센터 전두엽에서 올바르게 제어했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감정은 남았던 것 같다. 세밀한 기억은 세세한 감정으로 남아 한정된 메모리를 차지한다. <별빛 속에> 시이라젠느의 기억은 지워져도 기억으로 생성된 감정은 보존된 것이리라. 나는 나를 차지하는 감정의 소용돌이 바깥으로 물러나 그것을 바라본다.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한 것은 이제라도 알아가기 때문일까? 인간관계가 완벽하게 연결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래도 괜찮다. 뇌 속 배관이 가시덤불처럼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내가 나를 스스로 알아갈 방편이 있기 때문이다. 박사에게 아름다운 수학 수식이 있었던 것처럼 내게는 읽을 수 있는 책이 있다. 나라는 자연을 공부하는 만큼 나는 '나'에게서 벗어난다. 엉켜 있는 기억과 감정 회로에서 빠져나간다. 눈부신 오늘을 살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