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머리 한 올 발견한 날 치른 의식
처음 만난 흰 머리카락. 형광등을 켜고 머리 빗질 하다가 한 가닥 눈에 띄는 머리카락을 봤다. 노란색 조명만 켜고 살아서 몰랐구나! 밝은 불빛에 반사된 것이라 희망한들 부질없었다. 아무리 빗겨봐도 흰머리였다. 검은 머리숱 안으로 모습을 자꾸 감춰서 애가 탔으나 열손가락으로 마구 헤집었더니 여봐란듯 정체를 드러낸다. 세면대 거울에 비친 나를 마주하고 펄쩍 뛰며 지르는 호들갑에 아이가 달려와 변기뚜껑에 올라선다. 그리고 내가 괘씸해하며 뽑아낸 머리카락을 가져가더니 집안 어딘가에 감춘다. 내가 흰머리 붙들고 감정기복 최고최저점을 찍을 것을 아는 것인가.
그렇게 한바탕 수선을 떨고 나서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 햇살이 사위어가는 시간. 조도가 낮은 조명이 세상을 부드럽게 비춘다. 내가 앞장서서 달리고 아이가 뒤따라온다. 이제 뒤돌아보며 확인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자전거를 탄다. 나는 종교가 없으나 불과 이틀 전 '밀알'의 비유를 이해한 양 감격했었다. 부모는 자식 세대를 위해 썩어서(?) 먼지로 흩어져도 의미 있다며. 그러나 이 순간 나는 생명에 기어이 바늘구멍이 뚫린 것 같은 느낌에 예쁘게 노을 진 하늘마저 서운하다. 그 미세한 구멍으로 남아있는 젊음이 새어나갈 것 같다는 무거운 생각은 오르막을 만나자 사라진다. 역시 몸을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기분 전환을 위한 의식을 추가했다. 가고 싶어 했던 일본 라멘집에 가는 것. 오늘처럼 내면이 무말랭이처럼 쪼그라드는 날에는 라면이 아니라 라멘이다. 나는 열두 살 아이와 둘이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영업할 것 같은 라멘 가게에 들어갔다.
검은색 미닫이 문에 기름때가 살짝 껴있다. 벌써 설렌다. 번화한 거리에서 아주 살짝 벗어난 위치에, 손님이 80% 앉아있으며 조리하는 주방장과 서빙하는 직원이 리듬 타듯이 바쁘게 일하는 가게는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간장과 기름 냄새가 배어있는 가게에 일본 가요가 흐른다. 나는 두 사람 몫의 라멘을 주문하고 주방과 마주한 기다란 바 맨 끝에 아이랑 나란히 앉았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강렬한 하얀 조명은 없다. 지브리 애니메이션 스케치와 손님들이 영수증에 남긴 삼색 고양이 그림, 매화 문양이 그려진 작은 가림막 등 가게는 오밀조밀하고 아늑하다. 혼밥 하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찬 적당한 소음 덕분에 오히려 긴장이 풀린다. 그리고 눈앞엔 사람처럼 직립한 물고기 인형이 클래식한 마이크를 들고 스탠바이 중이다. '미스터 빅 배스. 버튼을 누르면 노래를 부릅니다' 메모가 붙어 있다.
단 거 먹으면 안 된다고 아이를 조금 전 단속해 놓고 마음의 고삐가 풀린 나는 "마실래?" 굳이 권하며 사이다 한 캔을 주문한다. 방금 전 1500원 청경채를 살까 말까 해놓고 지금 한 캔에 6000원 하는 맥주를 주문한다. 활활 타오르는 붉은색 라멘 국물 옆에 얼린 맥주잔이 놓인다. 작은 잔에 세 번에 걸쳐 맥주를 따른다. 아사히 맥주를 든 손과 사이다를 든 손이 건배한다. 아까부터 눌러보고 싶었던 노래 버튼을 눌렀다. 커다란 입을 살짝 벌리고 있던 물고기는 마이크 잡은 지느러미를 흔들고 꼬리로 박자를 맞추며 많이 들어 본 미국 노래 I Will Survive를 열창한다. 웃겨서 라멘 가닥이 깨갱 목에 걸린다. 나 혼자 상심한 날 매운 라멘을 먹으며 눈물 대신 콧물을 훔친다. 남이 해주는 음식을 먹으며 느긋해진다. 아이에게 "나이 들어도 살아남을게." 했더니 "당연히 살아야지."라며 어느새 도타워진 손으로 내 등을 토닥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자전거를 끌고 걷는 내 앞으로 아이가 한참 앞서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