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해변길 걷고 정신 차려 일상으로
버섯 모양 등대가 지키고 있는 강원도 양양 해변을 따라 왕복 4km를 걸었다. 영화 <밀수>에서 해녀들이 물질한 해산물을 부려놓던 그곳처럼 하얗고 오래된 수산물 공판장도 지난다. 새벽을 지난 아침이라 청소 중이었다. 영화에서는 가난한 어민들이 생선 내장을 걷어가던 장소였는데, 실제 공판장 시멘트 바닥은 맑은 물로 여러 번 세수한 얼굴처럼 말끔했다. 바람이 살짝 불어오자 옅은 바다 내음이 실려왔다.
비를 머금지 않은 구름이 여름이불처럼 펼쳐진 하늘은 보드라운 햇살을 비췄다. 소금기 있는 바다 바람은 늘 머리카락을 사납게 휘젓곤 했는데 오늘만큼은 잠잠했다. 양양 해변에서 서핑하는 이들에게 좋은 날씨인지 무난한 날인지 모르지만 산책하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스쿠버 다이빙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고무옷을 입고 모여 있고 남애 해변 따라 나란한 서핑 강습소에는 서프보드가 가지런히 줄 세워 있다. 매일 파도를 탈 것 같은 이들의 몸은 짙게 그을려있다. 문득 피부에 햇살이 두텁게 스며있는 사람은 우울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곳에서 매일 새벽 일출을 본다면 이글이글 피가 데워지면서 혈액 순환도 아주 잘 될 것 같다.
동해안에서 거의 평생 살아온 사촌과 나눈 대화는 그랬다. 바닷물에 적신 신발이 삭는 것처럼 바다와 가까운 건물은 부식이 빠른 것 같다고. 해변마다 느낌이 다르지만 강릉 경포대 솔밭 따라 걸을 때 겪은 바람은 오뉴월에도 차고 거칠었다. 너른 해안에서 바람을 맞다 보면 욕심만큼 오래 머물 수 없었다. 그런데 이날의 날씨와 더불어 양양 해변은 너무나 고운 느낌인 거다.
아기자기하고 서핑하기 좋은 파도가 밀려오는 양양 해변. 현지 주민이 생활하는 동네 골목길마다 차분한 공기가 들어차 있다. 바다 바람에 해진 건물 둘레에 해당화와 메꽃과 이름 모를 야생화가 형광 조명을 받은 듯 선명하게 빛난다. 이곳의 분위기는 철공소와 오래된 벽돌 건물이 있는 문래동과 유사하다. 양양 남애항에선 고양이들마저 건장해 보였다. 따로 돌보는 집사가 없더라도 쉽게 생선 식사가 가능해서인지 고양이 특유의 거만한 매력이 뚝뚝 떨어진다. 이 모든 것이 양양 해변을 힙하게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양양에 살고 싶은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들어있는 책이 떠오른다. 제주도 사는 동안 나를 향했던 지인들의 호기심에 답장으로 보내도 적합한, 마루야마 겐지 선생의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는 하체부실 빈약한 몸뚱이를 가진 인간이 막연히 자연을 동경하면 어떻게 되는지 글로 후두려 패는 책이다. 생업 전선은 도시와 자연을 가리지 않는다. 지금 다시금 정신이 드는 것이다. 58년 개띠 출생 '마크 푸'씨는 마흔 전에 요절하셨다. 아린 마음에 그의 메시지를 담아 오게 되었다. 서핑하다가 돌아가신 이 분의 비장함이 내게 번져온다. 당장 물가상승의 파도가 강타하더라도 그 파도에 무력하게 잠기지 마시오. 그리고 그 파도를 타시오. 도시에서도 파도타기는 가능합니다. 생활은 양양 앞바다에도 경기도 모처에서도 치열한 것. 전설의 서퍼가 내게 묻는 것 같다. 도시에서 궁극적이고 영원한 평화를 어찌 받아들일 각오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