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체했을 때 응급 약방문

읽는 인간에 대하여

by Gomsk


알랭 드 보통의 고향인 취리히는 그의 책에서 고요하고 따분하게 묘사된다. '따분하다'는 정지 상태와 같은 의미로 쓸 수 있고 창조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표현인데 이 도시는 작가에게 더없는 사랑이다. 그렇다. 내면이 즐거움과 새로움으로 가득 차 외부에서 그것을 찾을 필요가 없다면 쾌적한 전차를 타고 다니며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도시가 최상의 거주지다.


배낭여행할 때 스위스를 거쳐갔다. 요정이 숲 속에 지은 도시 같은 베른에서 돌멩이 하나하나 반들거리는 거리를 구경하고, 루체른에서 맥도널드 빅맥세트(여행객의 부르주아적 소비)를 먹고 사자상을 보았다. 비가 살짝 내린 취리히 밤거리를 걷기도 했다. 솟은 빙산과 내려앉은 호수처럼 도시마저 깨끗하다. 따분한 그 느낌이 내게도 되살아난다. 그리고 그 정갈한 장소에서 복잡한 내면의 실을 천천히 자아내고 싶다. 나는 알랭 드 보통이 쓴 다음의 이 빛나는 문장이 좋다.



나는 자신의 내부가 흥미로워 굳이 도시까지 "흥미롭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을 원했다. 정열의 샘에 늘 가까이 있어서 도시가 "재미"없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을 사람을 원했다. 인간 영혼의 어둡고 비극적인 면을 잘 알고 있어서 취리히 주말의 고요를 고맙게 생각할 사람을 원했다.

-알랭 드 보통, <슬픔이 주는 기쁨>


이것이 작가의 시선이요, 작가의 말이고 책이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체한 마음이 뚫리고, 한 걸음 내디딜 수 있는 조각을 발아래 둔 것 같은 안도감을 느꼈다. 부르주아의 도시(물가를 고려하면 맞는 말)이자 따분해서 매력적이라는 취리히에 살고 있지 않더라도, 가슴을 강타하는 이 같은 문장을 만날 수 있으면 나의 세계 역시 촛불의 광원이 확대되듯 확장된다.



+

만화가 이진주 선생의 <깜찍한 사랑... 하니>의 배경이 스위스 베른이다. 금발의 치어걸 하니가 베른!!을 외치는 장면이 있다. 나는 이국의 귀여운 이 도시가 궁금해서 가보고 싶었다. 이후 동선이 취리히로 이어진 것은 순전히 교통 덕분이다. 밤기차로 곧장 이동하려던 나는 낮에 마주친 여자분의 호의로 그분이 예약한 취리히 어느 호텔에 같이 묵게 된다. 둘 다 혼자 여행 와서 베른의 아기자기한 상점과 거리를 구경하고 있었고 나는 자청해서 그녀가 원하는 구도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오전에 한 번 오후에 또 한 번 그렇게 두 번 스치고, 취리히행 기차도 같이 탔다. 그런데 밤거리에서 또 만난 것. 나보다 열 살 연상이었던 홍콩사람 미셀은 내 숙박비를 내주고, 내가 손빨래한 양말이 빨리 마르게 마른 수건으로 꾹꾹 눌러주었다.


그렇게 친절한 이를 만나기 전. 깜깜해지는 낯선 도시에서 잠잘 곳도 정해져 있지 않았던 그때, 나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었을까? 그냥 걷고 있었을까.. 특별할 것 없던 무색무취의 경험이 이렇게 되살아나다니, 역시 여행은 값지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리틀 포레스트, 내 마음속 사계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