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은 던진 공처럼 다시 돌아와
강원도 평창에 있는 캠핑장에 베이스캠프를 쳐놓고 봉평 인근으로 외출했다. 메밀밭은 구경하지 못했지만 키 작은 옥수수가 예쁘게 정돈되어 있는 마을을 산책했다. 가장자리를 장식하듯 심어진 대파와 넓고 촘촘한 감자 이랑 너머 반듯하게 줄지어 서있는 옥수수는 마치 정원수처럼 보였다. 옥수수 정원 너머에는 운동장에 잔디밭과 육상 트랙이 잘 정비된 초등학교가 있다. 그렇게 정갈한 분위기를 만끽하며 가만히 걸음을 옮기던 중 운동장 농구 골대로 배우자가 향한다.
옅은 머리색의 남편이 농구 골대 아래 있던 공을 드리블한다. 가장의 무게를 지고 출퇴근을 반복하고 저녁이면 누워서 쉬는 모습만 보다가 이 사람도 운동을 좋아하는 남학생이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짙은 남색 교복을 입고 등을 곧게 펴고 데생하던 열여덟 소년에게 30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내가 감상에 빠지는 동안 공놀이하는 그는 활기가 돈다.
잠시동안 아무도 그를 방해하지 않는다. 얽매이는 것 없이 자유투를 날린다. 잘 안될 수도 있을 거란 고약한 내 속마음과 달리 슛이 성공한다. 짐짓 태연하게 나는 환호한다. 영화 <멋진 하루>에서 병운(하정우 분)을 향한 희수(전도연 분)의 시선이 흔들릴 때처럼 놀랐지만. 350만 원을 빌려갔던 전 남자 친구 병운을 희수는 내내 스모키 화장한 눈매로 쏘아본다. 병운은 희수의 돈을 갚기 위해 돈을 빌리러 다닌다. 두 사람의 환장할 여정 내내 자동차마저 잔고장을 앓는다. 차를 살펴보는 병운을 희수는 못 미더워했지만 의외로 그는 차를 제대로 고쳤다. 이 영화의 긴 여운은 이 지점에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나를 사로잡는다.
배우자라는 굴레를 지우고 지며 돈 벌어오라고 바가지를 깊게 긁으며 살다 보니 남편이 한 사람으로서 갖고 있는 빛나는 면모를 나는 잊고 있었다.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 서로 공경하고 사랑하라는 주례사는 결혼식에 얹어지는 장식처럼 들렸다. 마흔 후반에 접어든 배우자는 갈색으로 염색이 흐려지고 있지만 당분간 이대로 있겠다고 한다. 가을까지 머리 손질 없이 둔다면 하얀 삽살개처럼 보일 것 같다. 이 사람의 작은 마음 변화를 내 마음에 담는다. 윤종신 노래 <오르막길>처럼 산중턱 어딘가를 둘이서 지게 지고 오르듯 일상을 반복하다가 옆을 지키는 단 한 사람을 보니 그는 한참 전에 백발이 되어있었다.